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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Sep 12. 2023

밤낮을 걷는 시간

산책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화창한 날에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데 없이 좋다. 대학생 때는 수업을 마치고 햇살이 좋은 날에는 종종 담쟁이덩굴로 둘러쳐진 학교 건물 앞이나 호숫가 앞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았다. 또 가끔은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사범대 앞 잔디밭에 모여 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에는 출퇴근에 바빠 한낮의 산책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점심을 먹은 후에라도 잠깐 짬을 내어 동료들과 함께 교정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결혼 전에는 저녁 시간에는 대부분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녔고, 그것만으로도 너끈히 만 7천 보 이상을 넘기곤 했다. 언제나 정신없이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에 에너지를 충전받는 타입이나 즐거운 동시에 왠지 모를 허전함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선택한 건 혼자만의 밤 산책이었다. 밤 산책이라고 해도 거창한 게 아니라 집까지 가는 마을버스 대신 천천히 걸어서 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게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노라면 모두가 잠든 밤에 나 혼자만 깨어 있는 것 같은 설렘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하늘을 보고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초록이 가득한 자연과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산책하는 거다. 2008년부터 몇 번씩 훌쩍 제주도로 떠나며 가장 원했던 건 올레길을 걷는 거였다. 3일이고 4일이고 매일 올레길을 한 코스씩 끊임없이 걷다 보면 복잡하던 머릿속도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그렇게 도합 열두 번을 제주에 가서 바다가 보이는 올레길은 거의 다 걸어보았다. 제주에서 만났던 그 어떤 볼거리보다 먹을거리보다 가장 좋았던 여행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몇 년 전 휴직을 하고 나서도 가장 하고 싶었던 건 햇살이 가득한 낮에 바깥에 나가 거리를 걷는 것이었다. 집에서 다니던 병원까지 50분을 걸어서 도착하고, 병원 진료를 마친 후에는 다시 병원에서 집까지 50분을 걸어 집으로 왔다. 집에서 병원까지만 걷는 게 심심해져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가서 걷기 좋은 길을 찾아다니며 걸었다.


   종로에서 시청, 을지로, 정동, 독립문, 서대문, 연세대까지, 청계천으로 동대문에서 동묘 앞, 청량리, 회기까지. 친한 동료샘과 함께 명일동에서 만나 고덕, 암사까지. 구의, 강변, 건대입구, 잠실까지, 또 합정에서 당산으로 양화대교를 지나 여의도까지, 용산에서 숙대입구를 지나 효창공원까지. 걸었던 모든 길은 내 두 다리에 새겨진 기억이다.


   언제나 산책은 내 삶의 일부였다. 속상하게도 2년 전 양쪽 다리를 번갈아 가며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산책을 중단해야 했다. 잠깐의 동네 산책에도 다리가 계속 저려서 채 10분을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제 막 치료를 시작했을 뿐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되었고 신경 주사도 맞았다. 몇 달간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많이 호전되면서 덕분에 산책 시간이 다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시간을 내어 밤이든 낮이든 꾸준히 산책하고 싶다. 걸을 수 있는 한은 산책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기 때문이다.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퇴근 후에는 우리 집 강아지 봉봉이와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산책해야지. 내게 산책은 충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오늘도 기분 좋은 산책을 충분히 누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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