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이라고 단정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칼처럼 자르듯 없어져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끝이고 더이상 없어. 라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편. 그래서 어떤 관계든 끝을 보기 보다는 슬슬 피하다 흐지부지 슬슬 풀어내는 형태로 마무리가 되고는 한다.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더 편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어떠한 방식이든 끝이라는 것은 관계의 끝 인 경우가 많을 텐데, 그것이 정말 끝인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사람의 세상이 끝나지 않는 이상 -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 - 어딘가에서는 다시 마주칠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관계는 정말 끝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힘든 시절의 끝, 좋았던 시절의 끝, 모든 시기의 끄트머리에는 나의 우유부단 한 스푼과 긍정의 희망 같은 한 스푼이 녹아서, 결국은 단정한 마무리가 아니라 어딘가 흐리멍덩한 잔재와 조각들이 남아서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관계의 끝, 이라는 것은 아마 소멸과 관계된 것일 텐데, 나아게는 아직 소멸의 기억이 많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어르신의 제사날이 되어서도, 생전의 사진과 글을을 살펴보다 보면 그 기억들은 내 머리속에 남아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꽤나 큰 일일 지라도,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어딘가 실제 소멸하지 않고 있더라도 소멸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결국은 끝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이다. 실제 소멸했지만 그 기억이 소멸하지 않아 영원히 생존하는 것과 같은 상황. 내가 기억하는 한, 계속 그 삶을 이어 나가고만 있는 모양으로.
공연예술에 대한 평론을 쓰는 목정원 작가의 공연이 있었다. 참 아름다운 언어로 순간을 남기는 사람이었는데, 관객 학교 라는 주제로 공연을 열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연은 그 순간이 지나면 영영 사라지는 것이고, 그 존재 자체가 소멸과 가까울진대, 그것을 기억하는 관객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고. 고로 관객의 존재 자체가, 관객이 공연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의 실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라는 의미 자체가 공연이라는 무형의 실체에 의미와 존재를 부여해 주는 것이라 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소멸의 담론이었던가. 극장에서 나누었던 숨소리, 말투, 그리고 분위기.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결국 날아가버렸다. 끝, 이었던 것이지만 오히려 이를 시작으로 그 파동이, 생각이, 관객을 통해 혹은 나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없을 공연이었고, 시간과 공간의 한 부분으로는 끝과 소멸이지만 마치 밧줄의 끝부분이 올올이 풀려 무한 발산 형태로 뻗어나가는 시작에 가까운 이벤트였던 것이다.
내가 지금껏 가져왔던 관계의 끝, 을 되새겨본다. 끊어낼 수 있는 끝 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어떤 친밀한 관계를 상호 가져왔던 사람들과의 관계였을 텐데, 연락이 끊겼고 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것을 끝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인이었다면 좀 다를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다시 의지를 가지고 연락한다면, 그 관계가 이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끝이라고 과연, 지금 현재, 부를 수 있을까. 초등학교 때 매일 등하교를 같이 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방학마다 서로의 집에서 놀던 무념무상의 시기들. 중학교 때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함께 따라다니며 진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의 얼굴도 떠오른다.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더위와 추위가 함께했던 기다림. 꿈만같던 그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또 금세 사라져 버리더라. 대학 시절, 평생 함께할 것만 같이 밤새 다양한 수다로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 역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게 하는 조금의 노력이 사라지자 금세 꺼지고 흩어져 버리고 날아가 버린, 20대의 모닥불 같은 기억들로 남았다. 이들과의 관계는 과연 끝인걸까, 아니면 끝이 아닌 걸까.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게 흐리게 기억속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다. 그 절친했던 친구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언제였는지, 어땠었는지 정말 나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평범한 하루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관계의 끝을 상정하고 끝이라 말하지 않는다. 한 순간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고, 또 헤어져도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또 먼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누군가와의 관계, 조직의 변화, 나의 물리적 이동이 진정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잠깐의 헤어짐과 이별이 올지라도 그것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다시 또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를 반갑게 인사하며 떠나보내고 싶다. 오늘 즐겁게 만났던 사람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순간일 지도 모르는 것이고, 그래서 정말 모순적일지라도 마지막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만난 그대, 내 인생에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오늘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으로 만들자, 이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일 수도 있으니까.
2021년, 나에게는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시기였고, 또다른 시작을 맞이하는 전기와 같은 한 해였지만 지난 3년 반 여를 끌어온 나의 일터와 나의 사람들에 아직 안녕이라고, 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마치 그만두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언젠가 다시 또 반갑게 다시 만나길. 2021년의 마지막 공연에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길. 이 공간에 또 다시 예전처럼 올 수 있길, 다시 또 다음이 있기를 기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