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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Mar 04. 2021

<하루 10분 인문학>

“하루 한 줄, 인문학에게 나를 묻는다”

<하루 10분 인문학>
“하루 한 줄, 인문학에게 나를 묻는다”

                                       해 헌 (海軒)

오늘은 인문학의 상징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문제를 바탕으로 플라톤을 비롯한
동서양의 현자들의 철학과 사상 등을 통해 인문학 이야기를 풀어보는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이준형은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코노믹리뷰>에서
<숨은 철학 찾기>라는 칼럼을 연재하였고 현재는 유투브채널 및 온라인 강의,
출판까지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작가입니다.
또 지일주 작가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공연
영상학과에 재학중이며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IQ156 멘사 회원이기도
하며 tvN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 ‘뇌섹남’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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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아름다움에 이끌릴까?
플라톤의 영원불변한 미의 이데아

당신은 무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위대한 화가들의 예술 작품이나 경이로운
자연환경, 사랑하는 사람 등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사실 ‘미(美)’는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존재합니다. 또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저건 왜 아름
답지?’,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할까?’ 등 말이죠.
그런데 이런 궁금증을 갖는 사람이 비단 우리만은 아닙니다. 과거 철학자들 역시
‘미학,美學,aesthetics’이라는 분야를 통해 아름다움을 둘러싼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대체 미란 무엇일까요?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이데아론을 통해 그 답을 생각해봅니다.
이데아란 사물과 사고가 지닌 완전 불변한 본질을 말합니다. 감각적 경험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완전성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하며 현실 세계는 그
복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죠. 가령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완전한 정삼각형을 볼 수 없지만 정삼각형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 이유를 이데아 세계의 정의를 영혼이 ‘상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론의 핵심은 존재자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는 데 있습니다.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중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란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지칭하는 바는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분리되어 있는 미의 이데아, 즉 미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플라톤에 따르면 만약 육체와 영혼이 아름답다면 그 육체와 영혼이 미의 이데아를
닮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미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미의 이데아는
영원하죠. 또 플라톤은 인간이 아름다운 물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사고나 행동이 신체보다 더 아름답다고 보았습니다. 즉,
정신적인 미가 더 고급한 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아름다움을 행한
다면 그는 스스로 이데아를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것으로 미를 모두 이해했다고 보기는 왠지 어려운 것 같나요? 당연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들은 어쩌면 미의 한 측면이나 예에 불과하니 말이죠.
미에 대한 정의와 궁금증은 어쩌면 미의 이데아가 영원한 만큼이나 영원히 이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그럼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죠. 우리는 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일까요? 정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홀린 듯 아름답다며 맑은 하늘을 카메라에 담고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짓는
걸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할까?
아름다움은 통념을 깨는 것이라는 칸트의 반성적 판단

당신은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예를 들어 입체파를 대표하는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괴상망측하다며
저주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피카소는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오늘날에도 피카소의 명성과는 별개로 그의 그림이 기괴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예술’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덥고 습한 여름날 을지면옥의 맑고 깨끗한 냉면 국물을 그릇째
마시며 “와, 이거 예술이네”라고 말할 때의 ‘예술’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예술과
관계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죠. 예술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1) 기예와 학술을 이르는 말.
(2)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3)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정의에 비춰보았을 때 냉면 국물을 먹으며 말한 예술의 정의는 아마 세 번째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반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에 담긴 예술은 두 번째 정의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나 그 결과물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죠.

칸트의 미학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칸트는 인식론과 윤리학은 물론 미학에 있어서도
근대적 관점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심미적 체험의 특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심미적 판단이 지닌 보편적 타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위해 칸트는 ‘반성적 판단’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죠.
칸트는 기존의 원리로 쉽게 재단되는 것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미학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통념을 깨는 것’뿐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종래의 문법을 깨뜨리고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법을 창조해내는 것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설명할 새로운 원리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심미적 체험은 규정적 판단보다는 반성적 판단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것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그저 아름답다고 믿어온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과는 다른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할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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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를 가지고,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에 나오는 질문을
통해 나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해주는 책을 한번 보았습니다.

그중 "아름다움"에 관한 주제를 선택하여 살펴보았는데, 서양 철학의 기본이 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중세이후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인 칸트의 주장을 가지고
진행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학"이라는 학문으로 정립한 것은 18세기 중반까지 내려와 독일의 바움가르텐의
저서 "미학"이 나와서부터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굉장히 주관적인 면이 강하기도 하고 객관적인 면도 함께 상존하는
개념이지요.  플라톤은 모든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를 통해 아름다움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불변의 본질은 이데아로서 존재하는데,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원래의 본질적인 이데아로서의 미가 있다고 주장
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칸트는 아름다움은 '통념을 깨는 것'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그냥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법과 틀을 깨는 파격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작품이 꼭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명제가
주어집니다.   저자가 예를 들었듯이, 피카소의 작품은 엄청나게 인정받고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지만, 모든 이가 아름답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현대미술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더 확장되어, 화장실 변기를 가져다 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한다든지, 일반 대량생산된 제품의 라벨이 예술이라고 하기도
하고, 기괴하고 무섭기까지 한 대상을 표현하고도 예술이라고 합니다.

이는 기존의 아름다움의 정의나 개념이 흔들리는 것으로, 칸트는 수백년 전에
이미 이를 '반성적 판단'이라는 말로 '파격,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 아름다움임을
말하고 있었네요.
현대미술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큰 기준인 "가격"이나 "유명세"를 본다면 점차
기존의 아름다움보다는 파격, 통념의 파괴 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으로는 현대 미술의 예술작품은 가슴으로는
아름다움을 아직 인정할 수 없지만, 이성적, 머리로는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단계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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