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노부오
<일본미술 이해의 길잡이> 쓰지 노부오
강 일 송
오늘은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예술은 그 시대, 그 장소, 그 사람들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미술은 대체로 다른 분야의 예술에 비해서 오래도록 전해져 온
작품들이 많습니다.
선사시대의 발렌도르프의 비너스나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을 보면
그렇지요.
그래서 자료가 많으니 후대에서 연구하기가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일본미술을 통해서 일본 문화를 한 번 보겠습니다.
10년 정도 전에 구입해서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이 책을 펼치고 새로운 느낌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쓰지 노부오(1932~)교수는 동경국립문화 연구소 연구원, 동북대학
과 동경대학 교수, 국제 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였다 합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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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미술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스스로 진단해 보고자 시도한
것인데, 말하자면 일본미술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일본미술은 일본인들이 아름다운 자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세계관의 중심이라 할 중국 대륙으로부터 전해온 미술
양식이나 기법을 하나의 규범으로 배우고 이를 토대로 발전한 “주변미술”
이라 할 수 있다.
로렌스 비니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일본인은 우리들 영국인이
이탈리아나 그리스를 대하는 것과 같은 시선을 중국으로 보낸다.“
메이지 유신이후 근대 일본미술이 서구로부터 배워들인 방식은 이전의
대륙미술의 섭취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일본미술이 대륙으로부터 배우고 얻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겠다.
중국 대륙을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일본의 미술뿐만 아니라
독자적이라고 생각한 생활풍습들조차 사실은 대륙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화에 있어서 ‘모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미술조차도 독창력을 발휘한 것은 송대(宋代)무렵이었으며, 중국미술
중 가장 장려하게 전개된 당대(唐代)미술이 훌륭한 창조성과 보편성을 겸비
한 것이었다고 하나 그 특색의 근원도 인도, 페르시아 미술을 받아들여
완성시킴으로써 비롯된 국제적인 성격에 있다고 하겠다.
즉 당나라미술도 ‘순수하게 중국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1943년 발간된 야시로 유키오의 “일본 미술의 특질”에 따르면
일본미술 형성의 요인으로
(1) 일본으로 건너온 대륙문화 및 근세 이후의 유럽문화
(2) 태양으로부터 혜택받은 밝은 자연
(3) 종교적 배경
(4) 국민의 생활양식과 국민성
(5) 재료와 기술
또한 일본미술의 특성을 “인상성”, “장식성”, “상징성”, “감상성” 의 4요소로
나누고 있다.
일본미의 하나인 장식미를 보자면,
12-13세기 초엽이 일본 장식미술의 전형이 확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가 멸망한 뒤 일본 정부의 대송 국교 기피로 송나라의 문물은
사무역으로만 들어왔는데, 그것이 희소성에 의해 오히려 귀족들의 중국문물
에 대한 동경심을 자극하였다.
새롭게 도래한 중국물품은 송,원의 회화, 집기류, 차도구, 문방구 등이었는데
그 중 천목(天目)찻그릇은 화려한 차문화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흐름으로 반(反)꾸밈의 문화도 태동을 하게 되는데
종교적 ‘공(空)’의 의미로서 “꾸미지 않는” 미의 계보로, 간결의 미, 생략의 미,
정적인 미 등이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선(禪)”, “고요한 정서(와비)”, “예스러운 운치(사비)” 등의
말이 일본의 미의식을 풀어내는 열쇠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의 다도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무라타 슈코(1423-1502)는 귀족취미적인
차를 선(禪)정신에 입각한 서민적인 요소를 중시하여 간소함의 차를 만들어
냈다. 센노리큐(1522-1591)선사는 다도의 모든 형식을 완성시켰는데, 화려함
의 다도로 천목찻그릇 등을 선호하던 분위기를 한국의 도자기와 일반 민중
잡기를 차의 도구로 확립시키면서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리큐는 만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마시는 고문으로, 주군인 히데요시의
화려한 취미의 다실을 만들기도 하지만 와비 사비 정신에 입각한 초암풍 다실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고려다완으로 불리는 조선의 사발을 다기로 사용하여 질박함의
정신을 표현하게 된다.
일본미술의 특질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대륙미술과의 관련성
이 무엇보다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일본 미술은 중국미술과의
공통점을 제거한다고 해서 없어져 버리는 빈약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미술이라는 위대한 교사에게 인도되어 늘 그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지키는 우등생이었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렇지도 않았다.
바다 건너에서 오는 새로운 것을 맞으며 기쁘게 맞아들인 다음 자신들의
생활환경과 방식에 맞추어 마음대로 개조해 버렸다. 때로는 그것을
패러디하기까지 하는 천진스러운 호기심과 유연한 응용력이 결과적으로
대륙미술의 아류로 끝나지 않고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고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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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미술에 대한 대략적인 총론 개념의 글을 한 번 보았습니다.
이전에도 “한중일 미의식”이란 책을 올렸을 때도, 일본의 미의식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일본은 기하학적 비례와 규칙 지향적 기질이 있다고 하였고, 압축을
좋아하고 간결함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자유분방함의 미학, 신명과 열정, 해학이 넘친다고
하였었지요.
오늘은 여러 특질 중 일본의 장식성(꾸밈), 비장식성에 대해서도 알아
보았고, 중국 대륙미술에 비해서 스스로를 주변미술이라 인정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외래에서 들어온 문화를 자기화시켜 패러디하기까지 하는 변용성도
보여 존재감이 없지 않다고 스스로 위안도 합니다.
제가 한 두 번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초암다실풍의 와비사비 문화가 일본 다도의
핵심으로 떠오른 후 우리의 조선막사발이 신격화될 정도로 엄청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였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도공을 납치해 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하였구요.
삼국시대 이전부터 수없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하염없이 한반도의 영향을 축소합니다.
최초의 일본미술사를 저술한 오카쿠라 덴신은 일본을 “아시아 문명의 박물관”
이라고 하고, 일본의 미술 역사를 “잇달아 밀려온 동양사상의 물결이 민족의식
에 부딪쳐 모래 위에 자취를 남기고 간 해변“이라 비유합니다.
이렇듯 일본으로 밀려온 동양사상의 물결이 한반도에서 비롯되었음에도
한반도는 대륙의 문화를 가져다 준 징검다리의 역할이라고 애써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당연히 어느 문화나 독자적인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당나라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고, 그 페르시아는 그리스나 이집트와
영향을 주고 받았지요.
우리 석굴암의 불상은 그리스풍이 몇 백년에 걸쳐 유럽에서 동아시아 끝까지
파도가 밀려와 낸 자국이라 하겠습니다.
동아시아의 맨 끝에 위치한 일본은 문화의 개화도 늦었고, 중국과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흡수하고 모방하다가, 네덜란드,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구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근대에 강대국으로 등장하였지요.
그들은 지금은 강대국이지만 역사에 대한 열등감이 늘 잠재해 있습니다.
이 열등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왜곡되게 나타나 현재 과거사의 사과나
위안부할머니들의 문제 등에도 회피와 거짓으로 일관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