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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0. 2016

<비잔틴 제국>

이노우에 고이치

<비잔틴 제국>, 이노우에 고이치
 
                                      강 일 송
 
오늘은 역사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끝이 나고,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으로
1453년 멸망 전까지 1000년이상 지속을 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자는 일본에서 비잔틴제국 역사학의 권위자로 서구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난 관점으
로 기존의 시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면서 이 책을 썼습니다.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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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에서 비잔틴제국으로의 변모하는 과정은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
치세하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제”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위대한 황제로 군림을 하는데, 이 존칭은
단순히 그의 강한 권력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박해받았던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스스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의 행위를 찬양한 것이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관성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도 현재 상황을 유지하려
고 하는 힘이 작용한다.
위기의 시기에, 지배계급이나 지식인뿐 아니라 민중들도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변화를
필요로 할 때 역사는 변화를 한다.
 
로마제국에서 비잔틴제국으로 변화한 이유는 심각한 위기에 대한 대응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1-2세기의 로마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구가하고 있었다.
즉, 네르바황제(재위 96-98)로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에 이르는
다섯 황제의 시대를 “5현제 시대”라고 한다.
 
당시 지중해는 “우리들의 바다”였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모든
도시들 사이에는 도로망이 완비되어 있었다. 도시 로마에는 제국 전체의 부가
집중되었고 시민들은 시리아의 견직물, 이집트의 유리제품, 그리스의 올리브유,
스페인의 생선 등 제국 각지의 특산품을 향유했다.
 
하지만 풍요로움 속에 깊은 곳에서 위기는 시작되고 있었는데, 로마를 위시한 이탈리
아에서는 산업전체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른바 생산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로마의 번영과 함께 퇴폐적인 생활이 유행했는데, 자신의 노동에 기초하지
않은 풍요로움이 퇴폐를 낳았던 것이다.
 
위기는 3세기에 들어와 한꺼번에 드러났고 “군인황제시대”라고 불리는 내란의
시기를 맞이하였는데, 재정난에 빠진 국가는 질이 나쁜 은화를 발행했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이후 자칭 황제들에 의한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이다.
그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정했다.
“콘스탄티노플”, 이 도시는 제국 1000년의 수도가 되었다.
 
4세기 말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리되었는데,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약화되다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433-493)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은 엄청난 규모의 성벽과 요새로 대비하여 훈족의 아틸라왕 뿐 아니라
1453년 오스만 군대 이전에는 아무도 대성벽을 공략한 이가 없었다.
 
비잔틴제국이 1000년을 이어간 그 동력은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전통과 이념을 이어
갔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와 시도를 추구했고, 위기에 대응해서 변모해간 과정
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상황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로마제국의 위기를 앞에 두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 고대 민주
정치에 마침표를 찍은 유스티아누스 1세, 이탈리아보다 슬라브 세계로 눈을 돌린
콘스탄티누스 5세, 지방귀족의 득세를 보며 그들과 제휴하기 위해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알렉시우스 1세, 스스로 국영 모범농장에 힘을 쏟았던 요하네스
3세, "바르바로이“라고 경멸했던 서구에 원조를 요청한 마누엘 2세 등등.
황제들은 그저 전통을 지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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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서구중심의 역사관에 대한 저자의 비판 의식입니다.
서구 입장에서 볼 때 비잔틴제국의 역사적 의미는, 아랍과 이슬람 투르크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방파제였다는 것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보존해서 르네상스가
발생하는데 공헌을 하였다는 점 등이라 합니다.
 
만일 비잔틴이 7세기에 이슬람세력에 멸망했다면 곧바로 서유럽까지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당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던 슬라브족도 이슬람교를 받아
들였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자는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비잔틴 제국이 형식적으로 로마제국의 전통을 지켜왔다고 하지만 내용적
으로는 오히려 서구와는 달리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교차로에 위치한 이유로
끊임없이 새로운 위협과 세력에 순응하기도 변화하기도, 투쟁하기도 하면서
버텨온 바에 의한 것이라는 겁니다.
 
명분과 이념에 매달리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인드를 가졌기에
1000년을 지속하였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엄청난 변화에 직면하는 현대에서
비잔틴 제국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가 된다고 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나 조직의 생존 사이클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위기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하면서 변화를 두려워 않고,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명분에 집착하다가, 청나라의 태종에 삼전도 굴욕을 당한 역사가
이 대목에서 되새겨집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에 최근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관계와 일본과의 관계
등에서 이 책에서 얻은 역사의 교훈인, 현명함과 유연함을 잘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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