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 말콤 글래드웰
강 일 송
오늘은 밀리언셀러 작가이자 대단한 경영사상가인 "말콤 글래드웰"의
신간인 "다윗과 골리앗"을 보려고 합니다. 말 중 인상파의 예를 들어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50년전 파리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티뇰 근교 카페 게르부아에 한 무리의 화가들이 모였는데, 리더는
"에두아르 마네"였고, 이 집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확고한 입지를
다진 화가였습니다. 마네의 절친으로 "에드가 드가"가 있는데, 재치로
마네에 필적할만한 인물이었으며, 키가 크고 목소리가 걸걸한
"폴 세잔", 자아도취가 강하고 굳센 의지의 "클로드 모네"는 다른
사람들보다 교육을 덜 받은 식료품집 아들이었습니다. 모네의 가장
친한 친구는 넉살좋은 건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로 모네의
초상화를 열한점이나 그릴 정도였습니다. 집단에서 도덕적 나침반
구실을 한 사람은 충직하고 원칙적이었던 "카미유 피사로" 였습니다.
가장 성미가 고약하고 인간관계를 꺼려했던 세잔조차 피사로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1860년대 파리의 미술비평가 집단은 인상파화가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하하는 투였고, 그들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미술상은
사실상 아무도 없었습니다.
19세기 파리 회화의 정점에는 가장 중요한 예술 전람회인 "살롱"
이 있었는데, 1860년대 프랑스에는 "전국적 명성"을 얻은
3000명의 화가가 각자 가장 잘 그린 작품 2-3점을 살롱에 제출하고
심사위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그림을 심사했는데, 통과 자체만으로
도 대단한 업적이었다 합니다.
살롱의 기준은 "작품은 올바른 원근법과 익숙한 예술적 전통을
따라야 했고, 현미경 수준으로 정밀하고 제대로 마무리가 되어야
했으며, 형식에 맞게 표구되어야 했다" 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인상파 화가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일상생활을 그렸고, 붓질은 눈에 띄게 드러났으며, 형체는
흐릿했습니다.
1865년 , 놀랍게도 살롱은 매춘부를 그린 마네의 작품 <올림피아>
를 받아들였는데, 이 그림은 파리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습니다.
르누아르, 바지유, 모네의 그림도 1868년 살롱심사를 통과했으나
전시기간중 이들의 작품은 주 전시실에서 치워졌고, 건물 뒤편
실패작들이 옮겨지는 곳으로 쫒겨났습니다.
결국 인상파들은 살롱의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그들이 의미를 찾지
못하는 종류의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살롱을 박차고 나와서
그들만의 전시공간에서 전시회를 따로 하게 됩니다.
그들은 큰 연못의 작은 물고기가 되기보다는,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
가 되고자 했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토끼장처럼 좁은 건물 꼭대기층에 걸려 있던 그림들을 오늘날
사려고 하면 적어도 10억달러 이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처럼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예로서, 인상파가 그 시대 막강한 영향력의 살롱을 통해 세상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조그맣지만 하나의 별도 전시공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즉, 내가 이기거나, 우위를 점할 수 없다면, 아예 전체의 판(field)을 바꾸어
경쟁을 하는 것이 훌륭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새로운 판을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고, 새로운 판을 벌여
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