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다케시
<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사카이 다케시
강 일 송
오늘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사카이 다케시(1954~)는 동경대학 문학부에서 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에서 바타유론(論)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호세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책은 고딕을 인문학적인 면에서 조명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고 하고, 일본에 권위있는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한 저서입니다.
지금까지 고딕을 건축양식이나 미술사적, 종교적 측면에서 다룬 책은 많았
지만, 사회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본 책은 없었다고 합니다.
한 번 보도록 하시지요.
--------------------------------------------------------
◉ 고딕과의 만남
유럽의 많은 도시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이 우뚝 솟아 있다.
고딕 대성당은 성스러운 것의 전당이며 가톨릭 신앙을 위한 구조물이었지만
민간의 자연숭배 사상이 스며든 종합적인 예술의 공간이었다.
먼저 고딕(gothic) 이라는 말의 유래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처음으로 고딕 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교양인들이었다. 그들은 알프스 이북에서 전파된 대건축의 양식을
이탈리아어로 고트인의 양식(gotico)라고 주장했는데, 이 말에는 멸시의 의미
가 담겨 있었다. 고딕이란 말은 이들이 사용한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했다.
고트인은 원래 스웨덴 남부에 살던 게르만 민족의 일파로 5세기에 서로마 제국
내로 침입해서 스페인 일대에 “서고트왕국(418-711)”, 이탈리아 반도에 “동고트
왕국(493-553)을 세웠다. 따라서 12세기의 북프랑스 사람들은 고트인과 직접
적인 관계가 없었다.
즉,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 그리고 고딕 건축에 대한
그들의 멸시가 엉뚱하게 들어 있는 이름인 것이다.
건축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딕 양식의 교회 건축물의 특징은
첫 번째, 높이를 드러내는 포인티드 아치가 천정에서 사용되었다
두 번째, 벽 옆면에 길고 큰 창이 뚫려 있다는 점이다. 이 창 덕분에 대량의
빛이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세 번째, 플라잉 버트레스와 버트레스의 사용인데, 기둥을 바깥에서 지탱하는
각진 아치, 또는 기둥을 버트레스라고 한다.
◉ 북프랑스의 자연과 이민족침입
고딕 대성당은 대자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12-13세기에 걸쳐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에 고딕 대성당이 건축이 되었는데
그 시기의 북프랑스를 먼저 살펴본다면,
하늘에서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숲이다.
숲 사이로 군데군데 농촌 촌락이 나타나는데, 초지를 태워 농지로 쓰는
원시적인 화전농업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농법은 생산량이 매우 낮아서
농민들은 늘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또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 것은, 계속된 이민족의 침입으로 고통받았기 때문
이다. 남쪽에는 이슬람을 믿는 사라센인이, 북쪽에서는 노르만인이, 동쪽에서는
기마민족인 마자르인이 계속 해서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했다.
이 시기 수도원은 재물과 음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킹(노르만인)이 보기에는 약탈하기에 가장 좋은 표적이었다.
수도사들은 이런 불행한 상황을 ‘요한계시록’의 종말 사상과 결부시켜 해석하며
희망을 얻고 살아갔다.
◉ 대개간 운동
사람들은 11세기 중반이 되면서 비로소 평화를 찾고 활력을 찾는다.
이 시기 울창한 숲의 나무를 베어 넘기고 농지를 만드는 개간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 현상을 “대개간 운동”이라고 불렀다.
개간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수도사들이었다. 중세에 수도사와 같은
엄격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인간-자연의 순서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신에게 보다 가까운 인간은 자기를 위해 그리고 신을 위해 자연을 활용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것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이었다.
수도사들은 개간한 경작지에 새로운 농기구와 농사법을 이용해 농업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켰다. 바퀴가 달린 쟁기, 소나 말에 수레를 매는 방법, 말발굽은
당시 농업기술의 3대 혁신이었다.
하지만 개간의 육체노동과 농사일에 종사한 것은 대부분 농민의 몫이었다.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숲의 나무를 베어도 정신적인 괴로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농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연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세기까지 북프랑스의 농민들에게 자연의 대표적인 얼굴은 숲이었고 높은
나무들의 무리였다. 두려움을 안겨주는 울창한 숲, 그러나 그만큼 신비롭고
깊은 매력이 풍부한 숲을 농민들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다.
◉ 도시로의 이주
대개간 운동으로 곡물량이 2배 정도 수확이 늘었지만, 인구가 3배로 늘어나면서
기상이변이 생기면 자주 기근현상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2-13세기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동시에 일어났는데,
첫 번째는 농촌지역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역인 숲을
없애고 있었고, 두 번째는 민간의 자연신앙을 지닌 채 도시지역으로 계속해서
이주를 해 왔다.
고딕 대성당은 이처럼 자연의 소멸과 인구의 이동이라는 큰 역사의 변화를 배경
으로 도시 속에 세워졌다.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농촌에서와 같은 지연, 혈연이 없어진 타인으로만 둘러
싸여진 공동체였다. 직업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과의 이웃됨은 불안감을 증대시켰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해 줄 새로운 공생의 원리를
찾기 시작했다.
◉ 새로운 공생의 원리
도시에는 직종에 따라 중세 유럽의 동업자조합인 길드가 존재했고, 도시의 자치와
치안을 담당한 코뮌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개인의 불안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도시민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종교원리가 필요해졌고, 중세의 도시
민중에게 예수의 어머니만큼 유력한 중재자로 위로해 줄 이는 없었다.
따라서 대성당의 이름 노트르담이라는 호칭도 성모신앙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12세기 북프랑스의 주교가 있는 도시에서는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딕
대성당이 차례로 건립되었는데, 파리, 스트라스부르, 루앙, 랭스, 아미앵 등
북프랑스의 대성당 대부분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 숲의 전당
이제 고딕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 곳은 깊은 숲의 세계이다.
성당 내부에 좌우로 줄지어 서 있는 높이 20미터 정도의 돌기둥들은 대개간
운동 때 사라진 너도밤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성당내의 어슴푸레하고 무서우며 신비로운 분위기는 한낮의 숲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기둥과 바닥에 일곱
색깔의 영상을 떨어뜨린다.
이는 숲 속의 나무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빛에 비유할 수 있다.
◉ 이미지 시대, 고딕의 부활
질서와 비례를 무시할 듯이 높이를 지향하는 성격과 과잉이라는 고딕의 근본
적인 특징에서 자연계의 풍요로운 에너지에 대한 중세 사람들의 감수성을
읽어낼 수 있는데, 이후 이러한 비이성적인 특징으로 합리성과 문자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자 고딕은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성당은 다르게 표현하면 “이미지의 왕국”이다. 서구에서 종교개혁과 이성이
발달하기 이전까지, 성당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교육하던 이미지의
집합소였다. 성당에는 온갖 조형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다시 시대가 변하고 있다. 문자가 주는 건조함보다 이미지가 주는
감성이, 추론과 분석을 통한 사고보다 즉각적이며 종합적인 아이디어가 더
각광받는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즉 이미지의 시대, 고딕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21세기는 상상력의 시대가 아니던가?
----------------------------------------------------------
오늘은 고딕이라는 창을 통해서 유럽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글을 한 번
보았습니다.
그냥 건축의 한 양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고딕을 통해서 유럽의 배경
문화를 알게 하는 것이 오늘 책의 숨은 가치입니다.
이탈리아반도 사람들이 야만인으로 여기던 알프스 이북의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은 로마제국을 침입해서 서고트왕국, 동고트왕국을 세웠기에
고트족들을 미워하고 멸시하는 풍조가 이탈리아내에 있었을터이고, 그것이
고딕이라는 이름에 그대로 배여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문화든 그 기본이 되는 지역의 사람들과 자연이 하나의 틀이 되어서
형성이 된다고 본다면, 고딕양식도 북프랑스의 숲과 가난하고 자연을 경외
하는 농민들의 마음이 만들어 내었다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미지 인문학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고대의 이미지 -> 중세의 문자 ->
현대 이미지 순서로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이미지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딕에 대한 관심도 다시 늘어났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유럽에서 흔히 보는 위압감이 넘치는 거대한 성당들이 사실은 기층
농민들이 대개간으로 인한 자연훼손에 대하여 가지게 된 죄책감, 그리고
처음으로 혈연,지연이 없는 도시생활을 하게 된 후 가지게 된 불안감을
해소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성스러운 장소로서 높은 천정과 쭉쭉 뻗은 나무와 같은 기둥들, 스테인드
글라스릍 통해 쏟아져 내리던 색색의 빛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숲에서처럼 편안함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겠지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