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순
<미술관에서 만난 심리학> 박홍순
강 일 송
오늘은 미술과 문학을 매개로 심리학을 논해보는 책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는 일찍이 “미술관 옆 인문학”,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 등의 베스트
셀러 작가이고, 동서양의 고전을 대중들에게 쉽게 안내하기 위해 애쓰고
예술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사고를 접목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책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요즘 어느 서점에서나 심리학책이 유행입니다. 이는 곧 사람들의 필요가
있으니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지금 시절이 저마다 경쟁사회에
힘들어하고 현실에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미술과 문학을 통해 한결 친근하게 독자들을 심리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다양한 글 중 한 세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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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지배하고 복종하는가?
19세기 말 미국을 대표하는 자연주의 화가 윈즐로 호머(Winslow Homer,
1836-1910)는 단순한 자연모방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을 벗어나려 했다.
아래에 나오는 “허리케인 이후, 1899”라는 작품을 보자.
미친 듯이 바다를 뒤흔들던 허리케인은 이제 잠잠하다. 막 걷히기 시작한
검은 구름이 보이고, 백사장에는 끔찍한 흔적을 남겨놓았다.
난파된 배 옆에 흑인이 내던져진 상태다. 가까스로 해안에 도착한 후 기진맥진
해서 쓰러졌는지, 아니면 이미 시체가 되어 올라왔는지는 알 수 없다.
호머는 왜 허리케인에 휨쓸린 인물로 흑인을 그려 넣었을까?
미국에서 1862년에 법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흑인은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다수의 백인이 흑인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사회에서 화가는 흑인이
처한 삶의 조건을 허리케인에 무방비로 노출된 조각배에 비유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오랜 기간 흑인을 노예로 지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철저한 복종이다.
복종의 강제를 위해 사용된 일차적 수단은 당연히 무자비한 폭력이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만으로는 지배와 복종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에
안정적 지배를 위해 법적, 제도적 장치를 동원한 복종의 일상적 유지가 필수
적이다.
그러나 직접적 폭력이든 제도적 관리든 모두 강제에 기초하기에 반발이 따른다.
보다 안정적 지배를 위해서는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미국의 백인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화를 통해 흑인 내면으로 스며들어 심리 차원
에서 복종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시조로 불리는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의 “외투”
는 관료 기구와 사고방식이 어떻게 지배와 복종 심리를 뿌리내리도록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 아카키예비치는 만년 9급 관리다. 외투가 너무 낡아 수선할 수도 없게
되자 돈을 다 털어 새 외투를 장만하지만 다음날 강도에게 빼앗긴다.
외투를 되찾으려 경찰서장을 찾아가는 등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무시를
당하고 고위 관리를 찾아간다. 자초지종을 말하자 당장 불호령이 떨어진다.
“일의 순서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소? 어딜 찾아온 거요? 모든 사무는 순서를
밟아 진행되어야 하지 않소? 우선 창구에 탄원서를 내고, 서류가 계장, 과장을
거쳐 비서관에게 넘겨지고, 비서관이 나에게 가져오게 되어 있단 말이오.“
관료제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인 엄격한 절차주의가 나타난다.
이 고관은 높은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중요성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다 동원했다.
러시아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다. 근대 이후 모든 국가는 사회 전체를 관료기구화
한다. 피라미드의 각 칸마다 엄격한 절차를 두어 아래 칸에 있는 사람에게
무력감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하여 자연스럽게 전체를 위한 부분의 복종을
받아들인다.
또한 절차주의라는 수직체계는 비밀주의를 전제로 한다. 하위 단위의 움직임은
모두 위로 공개되지만 상위 단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권력 효과는 정보 장악 정도와 아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한 대다수는 만들어진 전체 구도 안에서
복종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서 관료제 절차주의는 경쟁 구조를 통해 지배와 복종 관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사다리를 오르는 유일한 방법으로 경쟁만이 허용된다.
모두가 경쟁을 통한 상승에 몰두할 때 사다리 절차를 규정하는 규칙은 마치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라도 된 듯이 절대적 권위를 획득한다.
경쟁 규칙에 대한 복종이 절대화되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전체 질서에 자발적
으로 복종하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어디서 그 따위의 정신을 집어넣어 가지고 왔소? 지금 누구를 상대로 그런
소릴 하는지 알고 있소?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누구라도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언성을 높여 호통을 친다.
아카키에비치가 이미 50세를 넘었지만 그저 철없는 아이 취급을 당한다.
단 한 칸이라도 위에 있으면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다.
한국에서도 새파란 나이의 판사나 검사를 ‘영감’이라고 불렀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피고인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
이다. 관료적 권위주의는 단지 역할의 우위를 넘어 인격적 우위까지 보장한다.
마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도록 한다. 행여 나타날 수 있는,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려는 시도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한다.
더 큰 문제는 애초에 어떤 인간성을 가졌든 관료제라는 틀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 자체가 개조된다는 점이다.
“그도 본심은 착한 사람이어서 친구도 잘 사귀었고 남의 일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칙임관이라는 벼슬자리가 머리를 돌게 했다.
칙임관에 임명되자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자기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어리둥절해 버린 것이었다.“
고관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원래는 마음씨도 따뜻해서 주변의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지위를 얻자마자 사람 자체가 변했다.
대등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의젓한 모습니다. 하지만 단 한 등급이라도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태도가 돌변해 버린다.
만약 정말로 관료제가 인간성을 뒤바꿔버린다면 누구나 그러한 위치에 있게
되거나 비슷한 기분을 갖게 되면 얼마든지 가혹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관료제 아래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위의 정도에 따라 비굴하게
복종을 받아들이고, 또한 불특정 다수에게 횡포를 부리게 된다는 심각한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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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심리학 파트에서도 “지배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았
습니다.
사실 인간은, 아니 동물들도 권력욕, 지배욕이 명확히 존재를 합니다.
개들도 우리에 모아 놓으면 금방 서열을 정하지요. TV에서 동물의 왕국
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나온 프로그램을 보면 확실히 그러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지요. 자연에서 살아온 본능이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자기분야의 사람을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센 상대인지 약한 상대
인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몇 합만 겨뤄보면 금방 알게 되지요.
또한 위의 글 내용처럼 착하고 순수한 사람도 어떤 자리에 오르면 그 자리
에 걸맞는 행동을 합니다. 역할을 따르는 것입니다.
군대사회에서도 그렇고, 대학병원의 레지던트사회도 좋은 예지요.
며칠만 먼저 입대해도 철저한 지배력을 가지고 복종하게 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레지던트의 연차도
비슷한 양상을 띱니다.
그리고 제복의 힘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양복정장을 잘 차려입었을 때와
예비군복을 입었을 때, 행동이 얼마나 다른지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친위대 대령 “아돌프 아히히만”이 국제 전범 재판
을 받았습니다. 600만의 사람을 학살했던 홀로코스트의 전범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는 상상과는 달리 너무나 평범한 가장이었고 가정에서는 든든한 아빠였으며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군인의 신분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조직에 속한 인간은 본인의 의지나 품성과는
상관없이 어느덧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영혼이 없는 부속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어떤 인간도 여기에 쉽게 저항하기 힘들다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고 큰
비애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