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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May 20. 2020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뉴턴의 아틀리에”中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뉴턴의 아틀리에”中

                                        해 헌 (海 軒)

오늘은 과학과 예술 사이를 이어주는, 예술을 사랑하는 과학자와 과학을 이해하고 있는
예술가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책에서 세 번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김상욱(1970~)교수는 카이스트에서 물리학으로 학사,석사,박사를 한 후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연구원, 도쿄대학교와 인스부르크대학교 방문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부산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경희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미술관을 즐겨 찾는 ‘다정한 물리학자’로 불리고
방송 <알쓸신잡>, <금요일 금요일밤에> 등에 출연하여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과학자
입니다.

두 번째 저자인 유지원은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독일 국제학술교류처
예술 장학생으로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했습니다.
국제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를,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전공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저서로는 <글자풍경>이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자연, 자연스러움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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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스러움의 아이러니

생물종으로서 인간의 행적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해서 ‘인공’이라 여기게 된 경계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물리법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무엇을 하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는 부자연
스러움이 발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구상 생명 네트워크 관점에서
보면, 인간 종은 생태계가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조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급한 도약을
했다. 그 결과, 자연의 생태계를 거스르는 치명성을 드러냈다.

‘자연’과 ‘자연스러움’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인간이 만들어도 그보다
인위적이지 않을 것 같은 형상과 색채를 가진 생물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움’이란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관념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보편성과 다양한 문화별, 개인별
특수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계’에 대비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때의 ‘인간적’은 놀랍
게도 ‘인위’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다른 생물, 특히 동물에 대비해서는 ‘인간답다’
라는 표현을 쓴다. 이때의 인간다움은 ‘야만’ 아닌 ‘문명’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계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울 수 없을까?
니시즈카 료코가 디자인한 서체인 ‘카즈라키체’는 손으로 쓴 글처럼 보이지만 디지털
폰트다. 예술가의 손길이 오래 닿은 예술의 인위성과 최신 디지털 폰트 엔지니어링의
매커니즘이 합작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도의 ‘자연스러움’에 도달한 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다음 세기는 복잡성(complexity)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우리는 기계라고 하면 여전히 20세기 초반의 초기 기계 시대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모더니즘 미학을 떠올린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인 21세기로 들어서면서
기계와 결합한 예술에는 다시 유기적인 형태와 복잡성이 돌아왔다.

창작자들은 자연의 경이로운 복잡성과 다양성 아래 흐르는 원리와 패턴에 눈을 돌린다.
자연 속 생성 원리를 정량적으로 포착한 후, 그로부터 알고리즘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파생한다. 동시대의 기계 기술은 오히려 자연에 가까워지고, 자연스러워가는 양상을
보인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은 이렇듯 자연, 인간, 예술, 기술 모두에 종종 아이러니를
일으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추상명사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다’는 단어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중세 유럽에서 기형아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거나 버려졌다.
누가 자연스러운 것을 결정하는 것일까? 자연스럽다는 단어는 폭력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지상에서 모든 물체는 결국 멈추기 때문에, 정지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겼다. 물체가 움직인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운동법칙을 이루는 핵심 개념이었다. 자연스러움은 진리였다.
이후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으로 이어진다.
근대 과학은 정지가 아니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상태를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뉴턴의 제1법칙이다. 무엇인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 이류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운동이니까.
하지만 속도가 변한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를 ‘힘’이라고 부르자는
것이 뉴턴의 운동법칙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는 능력의 이론적 기반으로 목적론과
미학을 제시했다. 칸트의 철학에는 인식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 사이에 긴장이 존재
한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사이의 긴장이다.
인식되는 세계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자연과학의 대상이고, 행동은 자유의지를 갖는 인간의
도덕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과학과 도덕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칸트의 답은 목적론과 미학이다.
목적론이란 의미 없는 자연에 목적이나 의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위해
존재하고, 동식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미학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경험에서 나오는 주관적이 취향으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에 대한 ‘모방’이었다.
르네상스의 미술은 원근법의 도입으로 좀 더 눈에 보이는 자연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칸트에 와서도 미에 대한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말 자체가 자연과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생명의 모습은 진화의 결과다. 진화에는 목적이나
의도 따위는 없다. 그때그때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지닌 것들이 자연선택되어 생존에
성공한 것뿐이다. 어찌 보면 그런 결과는 무작위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현대미술에서 미의 보편적이고 합법칙적인 기준을 이야기한다면 바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갖다 놓고 미술품이라 주장하지 않았나. 잭슨 플록은 바닥에 놓인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흘리고 떨어뜨리고 뿌려서 작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미술 작품인지
논란이 있었지만 자연스럽기는 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물감이 중력이라는 자연의 인도를
받아 캔버스의 적당한 위치에 안착한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자연스럽기도
쉽지 않다.
현대미술은 근대 이전 생각되던 미의 합법칙성을 뛰어넘었지만 자연스럽다는 기준을 뛰어
넘기는 쉽지 않으리라.
물리학자의 시각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자연법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다. 물리학자가 자연스러움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근대 이전 미의 법칙을 뛰어넘은 현대미술은 물리학의 경계조차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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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와 타이포그래퍼 유지원 교수의 글을 "자연스러움"
주제로 같이 보았습니다.

자연은 말그대로 사전의 정의를 보면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의 힘, 즉 인공이 들어가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자들은 이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자연", "자연스러움"을 밝혀
내고 있는데, 기계에 대비할 때는 사람, 인공적인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표현을
하고, 아래에 있는 "카즈라키체"처럼 기계가 쓴 글자체가 사람이 쓴 글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곧, 자연스러움이란 받아들이는 인간의 관념에 달려있고, 기계가 더 자연스러움을
표현하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김상욱 교수는 자연스럽게 태어난 기형아나 형상이 예쁘지 못하면 자연스럽
지 않다고 도태해온 중세 유럽이나 여러 동양 문화권에서의 행태를 보면서,
"자연스러움"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교수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
눈에 아름답지 않거나 비정상적으로 보여도 말이지요.
물리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이 무엇을 하건 자연법칙 안에서 이루어지고 이를
거스를 수 없기에,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이 한 것도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기에는 미술이란 "미메시스(모방)"이라 하였지요.
이후에 르네상스를 거치고 근대와 현대를 넘어오면서 미의 개념은 많이 바뀌었고
중세와 근대에 생각하던 "미의 보편성" 등은 현대미술에서는 완전히 넘어서게
됩니다.  즉, 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즉흥적이고 상업적, 인스턴트적인 것도
예술이라고 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자연스러움이 폭력적이 될 수 있음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정의랄까, 아니면 막연한 기준, 느낌은 다
있으시리라 생각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물 흐르듯이 흐르고 인위적으로 막거나
단절하지 아니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자연스러움과 평안함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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