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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훈 Dec 27. 2019

내가 우울증이라니

멕시코 시티, 프리다 칼로

잿빛 얼굴, 퀭한 채 불안한 시선, 악 다문 입, 축 처진 어깨. 현관문에 비친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피사체. 우울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떠오르던 모습이다. 의미 없는 시간이 이어진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저항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리를 이끌고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의지 없는 인사를 건넨다. 반쯤 풀린 눈으로 모니터를 켜고 반쯤 나간 정신으로 엑셀과 밤사이 일어난 사건들을 PPT 한 장에 욱여넣는다. 이미 사람들은 나의 우울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이미 우울과 무기력은 내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었다.


 드디어 6시. 퇴근을 준비한다. 매일 야근과 주말근무를 해야 했던 몇 달 전과 비하면 천지개벽할 노릇이다.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무실에 있자니 숨이 막혔다. 우울한 나를 데리고 더 이상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집에까지 일을 갖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살바엔..’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때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위급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위급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


 7월 중순의 6시는 여전히 화창하다. 날 보며 지금 퇴근하냐며, 공무원과 다름없어 보인다는 옆 부서의 농담 섞인 진담이 오늘따라 불쾌하다. 하루 종일 달궈진 차에 키를 꼽아 두고 그늘에 가려진 보도블록에 잠시 앉는다. 안에 있는 내부의 열기를 빼려는 듯 배기구는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다. 배기구로 나오는지 내 입에서 나오는지 모르는 한숨소리가 차 안을 채운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와 맥주를 계산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태양이 옆 건물에 가려져 차갑게 식은 집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 두 칸의 차가운 다세대 주택에 들어가면 온기를 느낄 수 없고, 그 냉기가 날 밀어내는 것만 같다. 냉기를 비집고 손에 든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바닥에 누우니, 에어컨 없이도 시원한 바닥만이 잠깐의 만족감을 준다. 내가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만족하는 부분이다. 그나마 겨울이 되면 단점이 된다. 불연듯 나지막이 뱉은 말.

“x발, 세상 살기 x랄 같네”


갑자기 귓속이 간지럽다. 파리가 들어간 모양이다. 귓속을 후벼 파니 손에는 미지근한 액체가 묻어 나온다. 눈물이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 몰랐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인연을 내가 떠나 보낸 것이 억울한 건지, 답 없이 살고 있는 현재가 비참한 건지 정확하지 않았다. 하나 있다면,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지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한 여름 태양이 한껏 괴롭힌 몸뚱이에서 뱉어낸 땀이 바닥의 냉기에 닿자 식어버렸다. 몸에는 오한이 느껴진다. 이대로 두면 분명 감기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저기 보이는 이불,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지만 애써 그렇지 않기로 했다. 주눅 든 얼굴에 차라리 감기라도 뒤집어쓰면 덜 비참할 것 같았다. 천장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형태가 있다. 그것은 한여름 강을 오염시키는 녹조의 색을 뗬고 꿀렁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점도가 있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커지고 있었고, 이질적인 그것을 보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곧 떨어지겠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불쾌한 녹색 덩어리는 얼굴로 떨어졌다. 꿈일 테니, 그것이 날 집어삼키면 헐레벌떡 꿈에서 깰 것이다. 그럴 것 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 공기주머니는 점차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모자란 숨을 몰아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발에 차이는 무언가가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해줬다. 조금씩 몸에서 힘이 빠져간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죽음이 날 원하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죽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지 죽음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발버둥을 치다 시선이 멈춘 방 안의 전신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고 방 안을 둘러보니 텔레비전에서 나올법한 범죄 현장이 펼쳐있었다. 밥솥은 옆으로 누어 저 멀리 굴러가 있고, 청소기는 널브러져 있고 선반에 꽂혀있던 책들은 지진이 지나간 듯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방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우울증을 겪은 지 8개월 만이었다.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빨리 인지하고 있었다. 우울증에 좋다는 온갖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달래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우울의 원인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곪은 다리에 빨간약만 바르는 것처럼, 마음의 염증은 계속 커져만 갔다.

갑자기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는 어느 날인가 내게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했다.


“아들. 엄마 너무 힘들어.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 이러다 엄마 죽으면, 아들 잘 살 수 있지?”

“엄마. 우울증은 아무도 못 도와줘. 엄마 스스로 나와야 해.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왜 이기적인 줄 알아? 본인만 힘든 줄 알거든. 그러니까 주변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알려고도 안 하고, 본인 힘든 걸 이해해달라고 소리치고 강요하잖아. 결국 스스로 나와야 해”

삶에 찌들어 있고 나만의 현실에 허우적 되고 있던 나는, 마치 의사라도 된 양,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단을 했다. 물론 애정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남들이 도와줄 거라는 나태한 기대를 버리고 그곳에서 시간을 좀먹지 않길 바랬을 뿐이었다. 나는 우울증 걸린 이들이 나약한 정신 때문에, 타인에게 기대려는 나태한 마음 때문에 걸리는 감기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도 감기가 단단히 들었다.


우울증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아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지 암 같은 질병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질병보다 위험하다. 사람들은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매 순간 죽음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원인모를 정신의 붕괴 앞에 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정도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정신의 고통 속에서 잘 이겨낸다. 문제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갱년기로 우울이 온 중년 여성은 앞으로 살 날을 어떻게 살 건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자신이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한탄을 하게 된다. 몸까지 아프니, 그동안 청춘을 바친 남편과 자식들이 원망스럽다. 뜻대로 안 되는 삶에서 우울이 온 사람들은, 마음에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다들 이렇게 산다는 위로 같은 협박으로 하루를 겨우 이어간다. 병이 발생하면 그 근본을 찾아 해결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치료하기를 거부해 놓고는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셈이다. 그러다 가장 취약한 정신상 태일 때, 수백 번의 싸움에서 우울함이 단 한 번의 승리를 거둘 때, 우울증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할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은 죽음의 문턱을 관광하는 걸로 끝났지만, 삶으로 돌아오는 티켓을 뺏어버리는 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울의 근원을 없애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고 날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울이라는 것은 없앨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고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모나 자식의 의무, 뜻대로 되지 않는 직장생활과 인간관계, 연인으로부터 받는 상처나 되돌릴 수 없는 실수 같이, 어렸을 적 장난 때문에 남겨진 얼굴의 상처와 같았다. 내 선택의 결과였지만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바라볼수록 죄책감에 휩싸였고, 그런 선택을 했던 나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야 했고,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했던 과오들, 특히 차마 얼굴을 들어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을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해 내며 수백 번을 곱씹었다.

프리다 칼로


***

멕시코 시티는 한마디로 우중충했다. 와하까와 뿌에르또 에스꼰디도에서 환상적인 시간을 보낸 것에 비하면 이곳은 불친절하고 하루에 몇 번이나 쏟아붓는 비 때문에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멕시코 시티가 나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한 달 정도 신나게 놀고 나니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서른다섯을 한 달도 안 남겨둔 남성이 해변에서 서핑이나 즐겨도 되는지, 한가롭게 전시회나 다니면서 한 번도 추구하지 않았던 예술적 안목을 쌓아가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를 잠식해갔다. 퇴사를 한 지 4개월,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사무실에 묶여 있었고, 아직도 여행을 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도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평생 원했던 거잖아!’라고 말하면 ‘두 달이면 충분하지 않아?’라며 한국행 티켓을 찾고 있었다.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지 이틀이나 됐지만 겨우 한 거라고는 타코 몇 점에 미술관 한 곳 간 것이 전부였다. 이럴 바에는 한국에 있는 게 더 나았다.


그날은 유독 아무 기대도 없던 날이었다. 라틴 아메리카 페미니즘의 선두주자 중 한 명인 프리다 칼로 박물관에 가는 날이었다. 그나마 멕시코 시티에 온 이유 중 하나였다. 양쪽 눈썹이 거의 닿을랑 말랑한 이색적인 외모만큼 그녀의 역사는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녀는 억세게 재수가 없는 여자였다. 재수가 옴 붙었다는 말은 그녀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유년기 소아마비 그리고 교통사고로 인한 35번의 수술을 받는다. 사고 시 파편이 자궁 근처를 관통함으로써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잃게 된다. 그녀의 삶은 산산조각 나 버린다. 만약 나였다면, 설령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온전한 정신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눈앞에서 그녀가 삶을 놓는 선택을 한다 해도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라는 불세출 멕시코 화가를 만나 안식을 취할 줄 알았으나, 못된 멕시칸 남자는 헌신했던 그녀에게 이혼이란 선물로 보답한다. 다행히 세상은 그녀에게 행복이란 걸 맛보게 해 준다.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그리고 당당한 페미니스트로써 세상에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 하지만 폐렴으로 47세라는 짧은 생으로 고통뿐인 삶을 내려놓게 된다.


파란 집 La casa azul으로 유명한 그녀의 공간에는 관광객이 넘친다. 벽에 걸린 그녀의 초상화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묻고 싶었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지 말이다. 어떤 삶의 목적이 당신을 이끌었는지 알고 싶었다. 제발 대답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번잡한 그녀의 집을 나와 반대편 멀찍이 있는 벤치에 앉아 파란 벽을 바라봤다.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솟구치는 존경심도 있었지만, 흘러넘치는 부끄러움에 두 손을 얼굴에 묻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결국 내 기준이었다. 누군가는 삶이 송두리째 뽑히는 고통에도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고, 누군가는 삶이 흔들린다고 불평하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나였다.


그날 하늘은 회색이었다. 그녀의 파란 집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무심한 멕시코의 수도는 소나기를 뿌렸다. 사람들은 소나기를 피해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몰려있었다. 한 뼘도 들어갈 수 없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인들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비를 맞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있었다. 소나기를 피해 달리지도 않았고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들을 웃고 있었다. 이 소나기가 곧 지나갈걸 알고 있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옷이 젖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나는 벤치에 앉아 소나기를 맞이했다.


긴 여행 동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마음속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우울함은 더 잘 살아내고 싶은 의지라는 노른자를 모아주는 얇은 막과 다름없다. 살아있다면 우울함은 당연하다. 다만 우울함은 찰나이고 조금씩 옅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생긴 우울함은 발생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주변에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보며 우울함은 더 커질 것이다. 만약 우울함이 발생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홀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홀로 산다면 그 고독함에 질식해 버릴 것이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울할 때가 이따금씩 온다. 원했던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 기대했던 대로 결과가 따라주지 않을 때 나는 우울해진다. 그럴 때면 잠시 나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우울한 그’에게 말한다. 너를 ‘이해한다’고 말이다. 언제든 원할 때 와도 되고 필요한 만큼 있다가도 된다고 말한다. 더 이상 ‘그’ 때문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언제든 오갈 수 있으니, 그런 ‘그’때문에 웅크려 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칼로는 말한다. “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 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을 지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갑각류의 탈피는 단순히 껍질을 벗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팔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니 성장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에게 가해진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내가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는, 사방이 똥으로 채워진 늪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고 똥은 어느새 가슴팍까지 들이찼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입속으로 똥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가라앉아 죽을 것인가 헤엄쳐서라도 벗어나야 하는가. 결국 똥구덩이를 헤엄쳐서 나오기 시작했다. 오물은 얼굴에 묻기도, 코로 들어가기도, 입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결국 뭍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우울함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똥밭에 손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을 말이다.


이젠 안다. 가만히 나 두고 보낼 여건을 만들어주면 될 우울을, 먹이를 주며 키웠고 사방을 똥밭으로 만들었다는 걸. 하지만 그 경험이 없었다면 한 번은 크게 허우적거려야 할 때에 다시 휘청거렸을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나?’라지만, 때론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울증이 그렇다. 냉정한 아들은 그제야 말 한마디 따뜻하게 못해준 본인을 자책한다. 똥밭에서 뒹굴고 있을 엄마에게 “배영을 하면 좀 더 나아”라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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