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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훈 Jan 02. 2020

피해자 코스프레

시우다드 바예스, 멕시코

"라떼는 말이야"

한 금융업체에서 제작했던 이 광고는 2~30대의 많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 말은 과거에 있었던 불합리나 어쩔 수 없이 해왔던 일들을 들먹거리며 에둘러 강요하는 꼰대들을 비꼬는 말이 돼버렸다. 그들이 비아냥 거리는 그들도 과거에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안주 대신 상사들을 물어뜯으며, 나의 때가 되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세대들이었다. 되풀이되는 역사처럼 우리도 그들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후임 J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비상경영으로 팀원들 전체가 작두 위에 올라탄 무당들처럼 음산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자신의 귀책을 남기지 않기 위해, 대화보단 전화로, 전화보다는 메일로 대화하던 시기였다. 수십 명 자판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땐 나도 J도, 다른 팀원 모두 한계점에 다다르던 시기였다. 파티션 두 개만 넘으면, 세 걸음이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나와 J와 수십 명이 첨부된 메일이 오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재촉하고, J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쫓기는 입장이었다. 변명하자면 나의 재촉은 다른 누군가의 재촉으로 시작된 폭탄 돌리기였다.


회신을 기다리다 못한 나는 단 세 걸음으로 그녀의 자리로 갔다. 그녀의 다이어리에는 ‘버틸힘이 없다… 퇴사할 타이밍인가?’라는 글이 쓰여있었다. 그녀는 굳이 다이어리를 숨기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팀장조차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J는 떠났다. 그래도 한마디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J의 빈자리를 보며 퇴사 결정이 ‘나로 인한 건 아니었을까’라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피해자였다. 피해자인 것은 분명 하나, 스스로 피해자의 탈을 썼던 것은 그때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피해자 코스프래를 해왔다. 상대가 이룬 성공을 축하해 주기보다는 “쟤들은 특별하니까”라며 자위했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외국에 있으면서 저 정도도 못하면 말이 안 되지” 라던가, 학벌이 좋은 친구들을 보면 “집에 돈 많아서 좋겠다”라며 내가 그들보다 잘할 수 없었던 이유를 들어 합리화했다. 내 실행의 부재는 생각도 안 하고 성취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과거의 나는 피해의식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옹졸하고 피해의식만이 가득한 내가 태어난 시점을 알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아주 오래전, 나의 유년시기 때부터였다. 사는 내내 가난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는 단 한번- 상병 휴가 나왔을 때를 제외하고는-을 빼고는 궁핍의 연속이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고 하셨어”라는 노랫가사를 몸소 경험했다는 것이 적절하겠다. 우리 가족은 짜장면 한 그릇에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두 분 다 열심히 사셨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중학생일 때 학교는 위탁급식을 실시했다. 도시락은 녹색과 노란색 통으로 나뉘어 교실로 전달되었는데, 친구들이 녹색 도시락을 가져가고 나면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를 위한 두세 개의 노란색의 도시락이 남았다. 내용물은 똑같지만 색깔로 나뉜 빈부격차는 50명이 넘는 친구들 앞에 매일 까발려졌다. 사내놈들이라 그런 것에는 무심했고 안다 해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여동생은 매일 점심시간이 곤욕이었을 것이다. 원래 가난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보다 스스로의 비참함에 잠식되어가는 법이다.


생각해보면 가난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가난에 물들어가는 자존감 파괴가 가장 위험했다. 학창 시절 나를 색으로 말한다면 ‘파란색’보다는 ‘회색’이었고, 제대로 웃어본 적도 없었다. 헌신적인 부모와 착한 여동생이 있었음에 감사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켜켜이 쌓여온 상처 받은 자존감은 지금의 피해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 나의 우울함이나 우울로 인한 삶의 병폐에 ‘모두 다 내 잘못은 아니야’라는 동반자살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 피해의식이 사회 탓이라 믿었다. 그 편이 나았고 그래야만 했다.


어느 날 팀장이 나를 따로 불러 점심을 먹었다. 잘 알고 있었다. J의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했다. 퇴사 면담을 했을 J는 분명 내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인사팀은 곧 사수였던 나를 호출할 것이다. 좋게 말하면 인사팀에 어떻게 잘 말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J를 힘들게 했던-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행동에 대한 질책을 받을 것이다. 대화는 전혀 다른 주제로 흘러갔다. 팀장은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은 엄청 가난했어. 하루는 쌀이 없는 거야. 배는 고픈데 너무 화가 나니까 배도 안 고프더라고. 문을 열고 방 안을 바라보는데 답이 없었어.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던 거야. 중학생이 뭘 할 수 있겠어. 공부밖에 없지. 그래서 장학금 주는데 맞춰서 대학에 갔지. 그다음은 네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아”


그녀는 회사에서 유명인이다. 웬만한 남자에게 꿀리지 않는 기, 말발, 그리고 회사에서 두 번째의 여성 팀장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부동산 부자로 소문나 있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임대업에 발을 디뎠고, 회사를 다니면서 연봉보다 수 배의-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확실한- 임대수익을 얻고 있었다. 팀장은 피해의식에 꽁꽁 싸여 매어 있는 나에게, 그렇게 불평불만을 떠벌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의도했던 아니던 그녀의 시도는 과녁에 명중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똑같이 가난에 허덕였음에도 누군가는 멋지게 헤쳐 나와 지금 같은 식탁 앞에 앉아 굴국밥을 먹고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듯, 나를 만든 것들은 모두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고 세상 탓만 했다. 원인은 나였다.


***

영롱한 청록색의 계곡 사이를 흐르는 곳, 나는 멕시코의 시우다드 바예스 Ciudad Valles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향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청록색의 물로 유명한 세묵 샴페이 Semuk Champei를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별로라는 말을 했다. 과테말라 평균 물가에 비하면 폭리나 다름없다는 비용 때문에 ‘꼭 가야 하는 곳인가?’라는 의문이 일고 있을 때, 산 루이스 포토시 San Luis Potosi에서 머물렀던 숙소 직원이 그곳보다 더 멋지고 래프팅도 할 수 있고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한 장소를 알려줬다.


산 루이스 포토시에서는 이불을 두 개나 껴입고 자야 했지만 불과 5시간 동쪽으로 이동하니 찌는 듯한 더위가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동네와 동남아 같은 날씨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본인 몸만 한 짐을 앞뒤로 맨 동양 남자가 스페인어로 “나는 더운 게 좋아”라고 외치니 옆의 아저씨가 미소를 보인다. 숙소는 영업 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인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어수선한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예약한 이틀만 머물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방에 들어가고서 바로 그 마음을 바꾸었다. 천장에 빽빽이 달려있는 팬은 에어컨 없이도 얼마나 시원할 수 있는지 알려줬고, 1층 침대에 과도한 푹신함은 그동안 벙크 bunk침대에 시달린 여행자의 마음을 아이스크림 녹이듯 위로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해졌다. 아침에는 계곡에 가서 물놀이를 하고 이른 점심에는 요리를 해서 맥주를 마시고, 밤에는 빔프로젝트로 영화를 틀어놓고 밤새 이야기했다.


그날 아침은 너무도 설렜다. 설레다 못해 잠도 설쳤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그건 설렘이 아니라 가지 말라는 몸속 신경계의 경고였을 것이다. 엘 살토 el salto라고 불리는 계곡 타이빙 투어였다. 보호구를 차고 옥색 강물을 유영하다가 4~5개의 절벽을 다이빙으로 내려오는 투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햇살도, 물 온도도, 투어 멤버들까지 말이다. 약 7m쯤 되는 마지막 점프, 두 번째로 마치고 아쉬운 옥색 물을 헤치며 끝나버린 투어를 아쉬워했다. 물 밖으로 나온 나는, 가이드가 다이빙 순간을 찍어주고 있는 저 바위 위에 올라가고 싶었다. 가이드에게 두 번이나 확인을 하고 바위 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스케이트를 타듯 몸이 미끄러졌다. 어떻게든 멈추기 위해 손톱으로 바위를 찍었지만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한 몸은 바위 끝까지 흘러갔고 결국 5m 정도의 바위에서 추락해버렸다. 머리로 떨어지기 시작한 몸은 사정없이 돌에 부딪히며, 돌이 튀어나와 있는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야구 선수가 던지는 공에 맞으면 잠시 동안 숨을 못 쉰다고 한다. 한동안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내게 달려와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파열된 곳은 없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가장 아픈 곳은 손가락이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손톱에는 녹색과 검은색이 손톱의 1/5 가량을 파고들었다. 이끼와 흙이었다. 그중 두 개는 살점과 떨어져 들려있었다. 일어날 수 있겠냐는 말에 몸을 세워봤지만 곧바로 주저앉았다. 오른쪽 다리와 팔이 말이 듣지 않았다. 응급조치를 하는 가이드는 연거푸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날은 포토시 주의 축제구간이었다. 관공서는 3일 내내 열지 않을 것이고 병원을 가려면 5시간 떨어진 포토시로 가야 한다며 앰뷸런스를 부르냐는 가이드의 말에, 하루 자고 대답을 준다고 했다. 정황상 하루 늦게 병원에 입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여행이 끝날 거란, 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신세를 지게 될 거란 직감을 했다. 부축을 받고 돌아오는 내 모습은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 모습과 같았다.


긴장이 풀리자 통증이 몰아쳤다. 숨쉬기 조차 어려웠다. 오른쪽은 손가락조차 접히질 않았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이 여행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동이 트는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야심 차게 시작한 여행은 불과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무려 4년 반을 준비했는데 말이다. 앉는 것조차 어려웠고 내 몸에 어떤 손상이 있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앞으로 투어사와 책임소재에 대해 다투어야 하며 그걸 위해서 얼마나 이곳에 있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울했다. 우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원망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아니 찾아야 했다. 이 모든 걸 망가뜨린 놈을 찾아 비난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라와도 된다고 말한 가이드? 닳아버린 샌들 밑창? 거기에 폭포가 있어서? 바위 위에 있는 이끼를 원망해야 할까? 원망은 끝은 나에게 멈췄다. 하필 이 투어사를 선택했고, 래프팅을 먼저 하고 다음날 해도 되는걸 굳이 오늘 해야 했던 미련한 선택을, 가이드가 허락했다 해도 굳이 그곳에 기어 올라간 내 잘못이었다. 마치 검사가 연쇄 살인범을 쫒듯 추궁하자, 이 여행을 선택한 나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원망하다 보면 끝이 없다.’


그렇다. 나는 이미 5미터의 바위에서 머리와 오른쪽 팔로 떨어진 바람에 손톱 두 개가 빠질 예정이다. 숨을 쉴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골반의 타박상때문에 침대에 걸터 앉는것도 고통스럽다. 오른쪽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화장실 가는 것도 침대에 눕는데도 수십 분이 걸린다. 하지만 이미 벌어지지 않았는가? 아직 병원 진료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병명을 진단하기에는 일렀다. 다행히 얼굴로 떨어지지 않았고,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 숨 쉬는 게 불편할 정도였던 전자제품 포장용 스티로폼 같았던 구명조끼는, 뾰족한 돌 위에 등으로 떨어졌을 때 몇 미리 안쪽의 내장과 머리를 보호했다. 최악을 생각하자면 나는 이 자리에 없어야 했다.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사건은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었다. 머리를 납득시키자,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허기가 고개를 드밀었다. 나으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기억났다. 주머니에 적당한 돈을 넣고 검은색 비닐봉지를 왼쪽 팔꿈치에 걸쳤다. 절뚝거리는 몸을 이끌고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를 사고 주머니를 가리켜 돈을 꺼내라고 말했다. 거스름돈은 반대쪽 주머니에 넣어달라고 했다. 반대 주머니는 큰 액수용 주머니라는 농담을 하자 아주머니가 호탕하게 웃는다. 양파를 사고 고수를 사고 원기회복을 돕는다는 와인도 샀다-물론 내 기준에서다-.


왼쪽 팔꿈치에 걸린 세 개의 봉지는,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불 꺼진 피자집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때만큼은 다친 곳 보다 고기가 든 봉지에 눌린 왼팔이 고통스러웠다. 오른쪽 팔 상황도 모르고 지 아픈 거 칭얼대는 왼팔의 모습에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벤치에 앉아 노을을 바라봤다. 마을은 퍼레이드가 열리는 옆 마을로 사람들이 몰린지라 텅텅 비어 있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나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원망하고, 힘든 것을 이해해주길 바랬고, 그걸 외면하면 분노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성장했다. 그 상황에서조차 ‘나는 너와 다른 상황이야’라며, 현재 결과의 원인이 나였다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력해도 변하지 않을 현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원망해서는 전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살다 보면 힘든 상황이 오기 마련이고, 사람이라면 그걸 원망한다. 그렇다 해도 좀 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원망하며 주저앉기보다는 눈물을 닦고 비난을 멈추고 다시 한발 내디뎌야 한다.


내가 피해자가 되기로 한다면 삶은 변명할 거리로 가득 찰 것이고, 실패를 인정하고 성장하기로 한다면 한 번쯤 해볼 만한 게임으로 바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도 하루가 해볼 만한 게임이 되도록 새벽 6시, 알람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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