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이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 내가 믿거나 또는 살아왔던 환경에 입각해 굳어진 생각의 편향성을 말한다. 나 역시 편견이 있었는데, 바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 편협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철들 거란 막연한 믿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통틀어 나는 편견을 능숙히 다루는 사람이었다. 지나간 일에 대해 쿨한 척 하지만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왜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그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었나’ ‘정말 싫다, 왜 하필 나인가?’라며 축복 같은 퇴근 후 시간을 낭비했다. 사회 기득권을 경멸했지만 그들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는 사람들을 욕했지만 나 또한 그들의 리그에 편입되고 싶은, 꼰대에 불과했다.
나는 꽤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과 주말근무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고 다시 쪼개 미래의 성과를 위해 정진했다. 반도체라는 업종 특성상 어떤 장소에서 배우는 것이 한정되었는데, 이유는 실시간으로 울리는 휴대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외국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유독 ‘외국어’에 대해서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에 가면 저절로 영어를 잘하게 될 것’이라는 굳은살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원하는 만큼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고, 반면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을 보면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도 일리가 있었다. '그들은 나만큼 공부하지 않을 것'이란 삐뚤어진 자만이 한몫했다. 그리고 호주에서 일 년간 지내게 된다. 꿈의 비자라는, 한국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워킹홀리데이였다. 이 후 그곳에서 내가 맞닥뜨린 편견에 혼쭐이 났다.
영어는 저절로 배워지지 않았다. 매일 어학원과 개인 공부가 반복되었다. 부족한 영어와 이질적인 억양 때문에 무시받고 때론 누군가에게는 차별과 위협이 가해졌다. 불합리한 상황은 매 순간 도처에 존재했고, 인내의 그릇이 텅텅 비는 날에는, 하루종일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달래던 날도 있었다. 하루 24시간 영어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곳에서 들인 노력과 고난은 한국에서 매일 몇 시간 공부했던 시간 따위가 비아냥 거릴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을 품었고, 그걸 취할 수 없었을 때 비하하고, 그 속에 스스로 갇혀버렸던 셈이다.
찰나의 깨달음은 한동안 삶의 중심을 잡아줬다. 하지만 시간은 삶을 성숙시켜주는 동시에 그에 걸맞은 고난을 선사한다. 취업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는 시간을 극복하자, 퇴사가 인생 최대 목표가 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런 시간 속에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목표했던 정신적 성숙함에 비해 여전히 좁디 좁은 몇개의 생각속에 갇혀있었다. 만약 나의 스트레스의 원인이 직장이라면, 그곳에 근무하던 수천 명의 직장동료나 직장인들이 나와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의미였다. 이십 대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나이가 문제였다면 내 나이 또래 모든 이들이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겪는 시간이지만 나는 어떤 것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걸 해소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것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평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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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의 세계여행 동안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는 말에 주저 없이 ‘순례자의 길’을 꼽겠다. 야곱이 가톨릭을 포교하기 위해 걸었던 810km를 따라 걷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순례객들이 모인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일반 여행객들과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30일 넘게 걷기 위해 온 사람들, 오랜 고민과 마주하고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자발적으로 고생길을 찾은 사람들은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루의 고민이라고는 어디서 묵을지, 몇 km를 걸을지를 제외하고는 오롯이 자신의 상념속에 잠식되어 질문의 답을 찾는다. 이런 전진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뭐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시도 앞에서 서성거렸던 한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얻게 된다.
내가 그 길을 걸은지 20일 정도 되었을 참이다. 자신을 한 초등학교의 교장이라 소개했던 한 중년 여성은 스무 살 초반의 아이들에게 정치적 성향을 강요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주지 않으면 “요즘 애들은..”이라면서 험담을 했다. 길을 걷는 내내 그녀는 한국인 순례객들의 기피 1순위였고, 오죽하면 그녀의 이름을 인명부에서 보고는 다른 숙소로 가던 이도 있었다. 저녁을 먹으려 자리에 앉자, 그녀가 내가 앉은 자리 앞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같이 걷던 독일의 A를 험담했다. 매일 같이 걷는 남자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중하게 말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 결국 불쾌한 티를 내자 중년 여성은 자리를 피했다. 다음날, 안면을 튼 다른 한국인 B가 나에게, 어제도 그녀가 A의 험담을 계속했다고 했다. 같이 걷고 싶지 않아 빨리 걸었는데 그 때문에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가 A를 험담한 이유는 꼬리를 치며 매일 남자를 바꾸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길 바랬다. 마주친다면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부디 마주치지 않길 빌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우릴 시험지 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녀가 내 앞에 앉아 있다. 예상대로 험담을 내뱉었고, 나는 그녀가 험담한 사실을 A에게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국인이 왜 외국인 편을 드냐’는 세상에 없던 논리를 피며 여자는 방으로 들어갔고, 그 이후 다시 마주칠 수 없었다.
그녀를 보면 왜 그리 불쾌했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20일 남짓 같이 걸으며 대화한 것뿐인 친구의 대변이라 말하기에는 그 불쾌감이 깊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과거의 나를 본 것이다. 그녀가 A에 대해 뭐라고 말했든 상관없이, 그녀의 편협함을 통해 과거의 나와 조우했고, 내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부정적 연민이 당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내게 가졌던 감정이라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그녀에게 느낀 분노는 친구를 옹호하기 위함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음도 아니었다. 과거의 나를 마주친 부끄러움이자 분노었다.
편견은 무섭다. 마치 암과 같아서, 내 몸이 병드는 것도 모른다. 온몸에 암이 퍼지고, 고통이 시작될 때쯤 내가 병에 걸린 걸 알게 된다. 타인들과의 다툼 이후, 외로움이 시작되어야 자신이 편견이란 병에 걸려있음을 알게 된다. 대게 암이라는 병명을 진단받으면 거부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병을 얻게 된 현실에 분노하고 결국 체념한다. 이처럼 나는 편견에 둘러쌓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분노하자 사람들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한기 속에서 스스로의 편견을 인정했다.
편견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편견을 깨는 것보다 뭔가를 깨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편견은 병과 같아서, 놔두면 스스로를 좀먹고 주변을 공허하게 만든다. 하지만 편견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의 삶은 짧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찰나와 같다. 편견을 깨기보다는 그냥 ‘나는 편견 투성이야’라고 하는 것이 더 빠를지 모르겠다. 하나 방법이 있다면, 이런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의 자연스러움은 이해하되 편견이라는 생각을 깨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유일하게 편견을 깰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책과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브라질 파라치 Paraty에서 평온한 밤이었다. 파라치는 작은 항구 도시로, 브라질에서 몇 안 되는 안전한 곳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에 조명이 비추면 쿠바의 트리니다드처럼 둥글둥글한 돌길과 마주한다. 바에 있는 의자를 밖으로 들고 나와 맥주를 한잔 시켰다. 때마침 보슬비가 내려 안경에 묻은 작은 물입자에 조명이 뒤틀린다. 뒤틀린 공간을 통해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길’이 헤맨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이 길을 따라가면 ‘길’이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를 만났던 것처럼, 내 인생에 길을 알려줄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보슬비 아래 예술가 인양 맥주를 마시는 외국인이 흥미로웠는지 한 브라질 중년 남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의 이름은 로드리고였다.
그는 내가 갖고 있던 브라질 남자의 편견을 몽땅 깨부수었다. 그는 축구를 싫어했고 미국 프로야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삼바도 좋지만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더 좋아하며, 미국 비자를 원하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그는 아시아 인들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스스로를 재단한다고 말했다. 어찌도 그렇게 과거의 나를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편견에 갇혀있었다.
편견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리고 기울어진 생각을 좀 더 균형 잡기 위해 다른 이의 생각에 귀 기울인다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의 나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첫 번째로 내 생각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고, 내가 왜 먼저 바뀌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생각은 계속 치우치기 마련이고, 그것은 편견이 되어 타인을 재단하고 결국 나 자신을 베는 상처가 된다. 만약 점점 외로워지고 있다면, 아마도 스스로의 일방향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당시에는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편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그녀를 피하듯 그들도 나를 피했다. 만약 지금의 나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혹시 모르겠다. 지금은 달라졌다는 편견에 갇혀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