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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훈 Jan 07. 2020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브라질 빈민촌, 파벨라

지금의 나는 그다지 후회하는 게 없다. 불안감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삶에서 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울증을 통해 그 감정 또한 당연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과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세월이라는 사포에 문대 져서 깎아지고 다듬어지더니 조금은 어색할지라도 보기 좋게 끼어 맞춰졌다. 이제는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수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시험’이다.


나는 유독 긴장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굳이 과거형으로 말한 것은, 스스로 긴장이 통제가 되지 않던 과거보다는 꽤 나아졌기 때문이다. 굳이 ‘과한 긴장’의 원인을 찾아보자면 유래 없던 2002년 최악의 불수능 때문이었을까? 글쎄, 수능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하기에는 점수가 볼품없었다. 그저 결과에 대한 ‘기대’가 남들보다 강했던 것이다.


 지금도 취업하기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지만, 불철주야 이력서를 송부했던 10년 전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지원’ 버튼을 클릭한 것이 아마도 백번 언저리였을 것이다. 최종면접을 치른 적도 꽤 있었지만 전적은 형편없었다. 유독 그 시간이 힘들었던 것은, 이른 기대감에 따른 실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운 좋게도 과거의 회사에 입사했다. 힘든 시기를 보낸 후 멋진 나를 기대했다. 예상했지만 회사는 또 다른 생존경쟁을 예고했다. 쏟아지는 업무는 물론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이어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일할 수 있음에 견딜만했다. 하지만 그 감사의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만 시켜주면 간이고 쓸개고 내줄 각오였지만, 더 이상 줄 간과 쓸개가 없었다. 이미 머리도 내어주고 대장도 내어주고 목과 눈알도 내어줬다. 당시 신경성 두통과 과민성 대장 증후군, 거북이목과 안구건조증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했다. 끝이 예정된 단편영화처럼, 직장이 울타리가 되어줄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은 입사한 지 3년 차였다. 그리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나는 토익 강사가 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득점-기왕이면 만점-의 토익점수가 필요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은 점차 날 초조하게 만들었다. 퇴근 후 모의고사를 두 개씩 풀길 두 달째, 시중에 있는 모든 토익 문제집은 세 번 이상씩 거쳤다. 어떤 문제는 빈칸의 위치를 외울 정도였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는 초라했다. 나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긴장을 완충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시험장에 들어서면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엔 잡념으로 가득 찬다.

‘이 답이 맞을까? 틀리면 어떡하지?’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시험의 난이도를 떠나 나는 모든 시험이라는 제목 아래 평정을 잃었다. 기대했던 그리고 노력했던 것에 비해 저조한 성적을 볼 때마다 나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노력이 부족했던 거야. 병x 같은 xx’


대부분은 시험 앞에서 나약해진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책상에 앉아 책을 펴기가 어렵다. 그것이 일 년에 몇 번 없고, 당락 자체가 이후 취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임용 또는 공무원 시험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공부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지만 별의별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시험을 잘못 보면 어떡하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부모님이 실망할 텐데’. 신경을 비집고 튀어나온 디스크가 전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듯, 미래에 대한 결과의 불확실은 우리의 정신을 헝클어 놓는다. 사실 이런 경우 방법은 없다. 고통스러워도 계속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그렇다.


여전히 나는 시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열심히 공부한 것에 비해 안타까운 결과에 화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내 노력이 부족했거나 긴장을 해소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대가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은 또 있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웃고 있는 모습이 없다. 30년 후의 내가 봐도 안타까울 정도로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사회 초년기 시절, 나는 과소비가 심했다. 급여의 반 이상을 옷과 액세서리를 사는데 낭비했다. 특정하게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는 것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갈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못난 얼굴을 커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방 한 칸이 몇 달간 선택되지 못한 옷들로 가득 찼다. 그때의 나는 일 년에 찍는 셀카는 세 장이 안될 정도로, 사진을 찍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고, 자연히 사진과는 먼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사진을 보시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얘. 못생겼으면 웃기라도 해야지.”

그 후로 오랜 뒤에, 더 못생겨지지 않기 위해 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

브라질에는 악명 높은 빈민가가 있다. 파벨라 Favela라고 불리는 이곳은 리우에만 4~5곳에 이르며, 갱단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티 오브 갓(2005년)’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여전히 일부 파벨라에는 경찰들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치안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신이 버린 곳’이라는 그곳에 혼자 갈 용기가 없던 나는, 다음날 투어를 통해 갈 예정이었다.


파라치 Paraty에서 리우로 넘어오기 직전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약했다. 리우 역시 불안한 치안으로 명성이 높은 곳인지라, 일 년 동안 중남미만 여행한 나도 긴장됐다. 높은 빌딩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차량을 보면 한국의 대도시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풍경을 한번 찍을까 하고 창문을 열려는 찰나, 기사가 제지했다. 문밖으로 휴대폰을 내미는 순간 오토바이가 와서 낚아챌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냉큼 집어넣는다. 차량은 조금씩 경사로를 올라갔다. 도시의 풍경과 달리 이곳은 다소 위험한 냄새가 났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파벨라로 향하고 있었고, 숙소는 파벨라에 위치해 있었다. 


‘숙소까지 데려다 달라’는 나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택시기사와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사실 그가 숙소까지 데려다주길 바랬다. 그는 돈을 받고 도망치듯 경사로를 내려갔다. 하이에나 우리에 던져진 닭처럼 불안에 떨면서 숙소를 찾아갔다. 숙소 직원은 이곳이 파벨라 중 가장 안전하다며, 내가 이곳에 묵는 두 번째 한국인이라는 말을 건넸다. 다만 며칠 전 파벨라 근처에서 갱단으로 오해받은 중국인 부부가 차에 앉은 채 총에 맞아 죽었고, 나보다 먼저 왔다던 한국인은 벌써 4년 전 이야기를 듣고 안도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해도 파벨라의 야경은 크나큰 위안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야경에 취해,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라는 오명은 미디어가 만든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말을 주어 담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째 아침이 밝았다. 파벨라라는 색안경을 제거하니 사람들은 친절했고 모두들 평화롭게 각자의 삶을 일구고 있었다. 갓 구운 빵 냄새를 쫒아 빵을 사고 나오는데 불현듯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다는 걸 느꼈다. 그런 것이 있다, 마치 태풍 전 고요같이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느낌 말이다. ‘별일 없겠지’ 하고 방으로 들어와 마저 짐을 싼 뒤 테라스에 올라가 빵을 가르자,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탕. 탕탕”, 총소리였다. 


푸른 타일로 둘러진 4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파벨라는 혼돈 그 자체였다. 열대는 족히 넘어 보이는 경찰 차량에서 경찰들이 쏟아져 내렸다. 방금 총소리는 제일 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두 경찰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어 총소리가 이어졌다. 4층 테라스에서 배를 깔고 누워 총성이 멈추길 기다렸다. 겨우 방에 들어가자 같이 묵던 브라질 친구가 총탄이 잘못 튕겨질 수 있으니 어서 누우라고 말했다. 여인의 비명소리, 개들 짖는 소리, 격양된 목소리는 쫓기는 자인지 쫒는 자인지 유추할 수 없었다. 총성이 멈추고 끝난 것 같다는 브라질 친구의 말을 듣고 가방을 들쳐 메고 달아나듯 나왔다. 이제야 왜 호스텔 문이 강철로 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철문 밖 상황은 여전히 대치중이었다. 골목길 한쪽 편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숨긴 청년- 많아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은 왼손에는 대마를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보지 못한 두 청년도 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보지 못했다’기보다는 신경 쓰지 않은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들이 골목 안으로 사라지자 재빨리 문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향긋한 빵을 뜯으며 걸어온 길을, 쫓기듯 내려가고 있다. 구불거리는 골목길 사이로 햇빛이 보이자,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두 명의 형사가 골목길 끝에서 나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는 짐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No hice nada, no hice nada!” 아무것도 안 했어요.


브라질의 악명 높은 파벨라에서 총격전을 벌이는데 나온 이가 가방을 앞뒤로 맨, 울기 직전의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그들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을 그들끼리 눈빛을 나누더니 나보고 어서 사라지라는 고갯짓을 보냈다. 그들을 지나 모퉁이를 돌았더니 경찰차 뒤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명의 경찰이 있었다. 그 뒤에는 겁에 질린 아이와 여자들이 마치 ‘쟤는 뭐야?’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중에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는 사람과 상황 파악을 위해 무전기에 귀를 대고 있는 경찰들이 섞여 있었다. 파벨라는 한국의 달동네같이 급한 경사를 거쳐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 뜻은 내려갈 때는 그 경사를 내려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한시도 있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굴러 떨어질 곳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등 뒤로 몇 번의 총성이 더 들렸다.


리우의 다른 곳에 짐을 푼 뒤 거실에 앉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반을 살짝 넘긴 시간이 무색하게 피로하고 지쳐버렸다. 만일 그곳에서 총이라도 맞았다면 사람들은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 ‘그런 위험한 곳에 간 자의 합당한 응보’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곳에 묵게 된 것이 내가 의도치 않았다는 걸 알지 못하겠지? 부모님도 미련한 자식의 선택을 안타까워하겠지?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진 빠지는 일들이 이어지는,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일들이 이어지는 그런 날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피할 수 있었던 일인 걸까?


너무 저렴한 숙소를 두 번 확인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계획한 대로 오늘 오전 파벨라 투어에 왔다면 이 총격전에 휩쓸리지 않았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원인을 찾는다면 리우에 온 것도, 중남미 여행을 온 것도, 세계여행을 시도한 것조차 오늘의 불행을 위한 원인이었던 셈이다. 

바꿔 생각한다면, 모든 일은 일어나기로 계획되어 있었고, 결국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원치 않는 것들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질 것이고, 모든 결과는 오롯이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브라질을 오겠다고 했으니 위험함을 감내해야 했고,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진짜 원하는 것을 찾겠다고 했으니, 궁핍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내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날 받아준 고마운 직장이 순간의 시간조차 견디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고 답답한 곳으로 바뀐 이유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고민의 결과였다. 모든 순간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상황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간혹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하며 자신을 좀먹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을 원망하다 보면 안타까운 것은 본인 자신이다. 불만족스러운 외모도 가난한 부모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별이 두려워 집착하지만, 누군가는 떠날 것이고 혼자의 시간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그런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원망하기보다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어쩔 수 있도록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난한 집안을 원망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삶의 어떤 고비 앞에서, 지금까지 헌신한 부모를 원망하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는 나였다면, ‘이 상황을 이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면 된다. 언제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것들을 부모들은 해왔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이 싫었다. 자정이 훌쩍 넘도록 일하는 부모님들이 싫었고, 그렇게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을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더 나은 삶의 조력자가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그 생각은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투영된 모양이다. 하루는 할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똥구멍 구리다고 뗄 수 있겠냐?”


우리는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기대를 한다. 사는 것이 내 뜻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시험, 인간관계, 외모 등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골머리를 싸맨다. 일어나지 않은 결과를 앞에 두고 뜻대로 되길 바라며 스트레스받는 것은, 마스카라가 번졌다며 파티에 가지 않는 것과 같다. ‘파티에 갈걸’ 하고 후회하기보다는, 어서 화장을 고치고 파티장에 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삶에 무엇이 들이닥칠지 모르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파벨라에서 본 야경은 인생을 통틀어 봤던 야경중 최고라고 말한다. 그곳이 그토록 좋은 기억일 수 있었던 것은, 죽을 뻔했던 총격전에서 살아남은 ‘감사함’ 같은 건 아니었을까.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총격전도 내 뜻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벌어졌다. 원망한들 달라질 건 없다. 중요한 건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사로를 달렸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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