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에 입대하여 2019년 겨울에 전역하였다. 곧 있으면 전역한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이 글은 양구의 최전방에서 근무하며 하루의 네 시간씩 북한을 바라보며 지낸 경계병의 특별한 기억의 일부이다.
이 글은 그곳에서 작성한 일기장 세 권과 수첩 일곱 권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글은 까만 밤, 작은 전등 아래에서 수놓은 글들이며 지금 와서 보면 꽤나 가치 있었던, 이제는 무덤덤히 볼 수 있는 그런 기록들이다.
거짓말처럼 그때의 사진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당시의 기억은 모두 글로만 기록되어그 가치가 더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글이 잘 마무리되어서 오랫동안 회자되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길 바란다.
2017년 3월의 어느 날 나와 가족은춘천으로 향했다. 입대 전에 부대의 근처에서 가족과 함께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춘천 시내에 도착하여 주변 미용실에서 머리를 밀었다. 이미 8개월 전에 머리를 밀어보았기 때문에 그리 어색한 얼굴은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지었던 표정도 그때와 비슷했다. 커다란 착잡함 뒤로 약간의 후련함이 맴돌았다. 머리를 밀 때면 일종의 후회가 밀려온다. 나는 대체 왜 그랬었을까 하는 후회말이다.
머리를 밀고 가족과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날씨가 꽤 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이 그리 착잡하지는 않았다. 어딘가로 도망쳐서 지내고 싶었다는 생각이 막연히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들보다 군대를 1년 늦게 갔기에 조금 조급한 마음도 있었다. 다음날 춘천에서의 아침이 밝았고 주변의 유명한 닭갈비집으로 향했다. 닭갈비집은 춘천의 소양강댐 근처에 위치했고 입대 직전이라 그러했는지 썩 맛이 좋지는 않았다. 아마 뭘 먹어도 그랬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양구의 훈련소로 향했다. 호국의 요람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수많은 인파와 함께 거대한 강당 안으로 사람들은 물 밀듯이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바닥에 즐비한 낮은 의자들,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던 풍경으로 기억한다. 나는 배정된 자리에 앉았고 부모님은 멀찍이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소지품을 전달하라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핸드폰과 지갑을 전달드렸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도 함께 부모님 손에 쥐어주었다. 유독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가족들은 모두 강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몇몇 군인들은 내부를 볼 수없게 강당의 커튼을 치고 몇몇 군인들은 우리에게 군복과 생활복을 나눠주었다. 이후 우리는 군복을 들고 생활관으로 향했다. 생활관 건물은 꽤 거대했다. 건물의 옆으로 취사장이 붙어있었고 건물의 뒤로 흡연장이 위치했다. 당연하게도 그곳을 이용하지는 못하였다. 생활관에 들어서니 조교들은 배정된 자리를 알려주었다. 나의 몸을 뉘일 수 있는 작은 직사각형의 자리가 주어졌다. 그리고 나의 자리의 양옆 그리고 맞은편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줄을 맞춰 앉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줄에 열명, 반대편에 열명이 마주 보고 앉았다. 나의 번호는 119번이었다.
첫날은 그리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 입고 왔던 옷을 집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소지품 검사를 했다. 차라리 담배와 라이터를 지금 부칠걸 후회하기도 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역할을 배정받고 군가를 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주변의 낯선 사람들과 처음으로 말을 텄다. 처음에는 이름, 나이, 고향을 물었고 사회에서 뭘 했는지를 물었다. 꿈은 무엇인지,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묻는 일은 10일이 지난 이후였다.
군대에서 처음 먹은 밥은 꽤 입맛에 맞았다. 그날 저녁밥을 먹고 다시생활관에 들어오던 때 군인이 되었구나라는 점을 새삼스레 다시 깨달았다. 서글픈 감정은 사실이지만 나 자신을 어떻게든 바꿀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찾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이 오히려 나를 진정시켰다. 엉망진창이었던 나의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왔다는 사실도 나름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쓸모가 생겼을 때 힘이 나는 편이다. 나의 자리를 배정받는다는 건 참 행복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훈련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당연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나의 기억에 자리하는 것은 첫 번째로 불침번을 섰을 때, 첫 번째로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을 때, 첫 번째로 인터넷 편지를 받았을 때와 같이 첫 번째 경험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은 처음으로 불침번을 섰을 때이다. 처음 불침번을 섰을 때는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로 기억한다. 주로 생활관 복도를 감시했고 생활관으로 난 작은 창을 통해 내부의 상황을 이따금씩 살폈다. 그 작은 창은 생활관과 함께나의 모습을 비추기도 하였다.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다 보면 시간은 꽤나 잘 흘렀다. 뭔가에 홀린 듯이, 혹은 나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한참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불침번의 또 다른 업무는 생활관 내 복도에 물을 뿌리는 일이었다. 3월의 군대 생활관은 너무 건조했기에 새벽에는 항상 바닥에 물을 적셔놓아야만 했다. 생활관에 들어가 잠든 동기들을 보면 모두 같은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였지만 동정심이 많이 들었다. 대부분의 군대 생활관이 그러하듯 나의 생활관에는 여러 나이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스무 살에 군대를 들어온 동생부터 나보다 5살이 많은 형까지 모두에게 동정을 느꼈다.
2018년 3월 24일, 처음으로 수첩을 받고 글을 쓴 날이다. 첫 번째 수첩에는 그날의 일과보다는 훈련 내용, 숙지해야 될 것들, 교육 내용 등을 적었다. 노트에 꿈을 쓰고 전역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일은 한 달 정도 후의 일이었다. 나는 어디에서든 환경에 대한 적응은 빨랐다. 무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혹은 나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나는 훈련소의 배식계를 자진해서 맡거나 궂은일들을 도맡았고 그에 따라 포상전화가 간혹 주어졌었다.
첫 번째 수첩
3월 25일 어머니와 처음으로 통화를 했다. 5분간 했던 통화를 하면서 나의 안위를 알리고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를 말씀드렸다. 이때의 전화는 모든 인원들에게 주어졌다. 전화를 할 수 있는 부스는 복도에 4개 정도가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에서 담담한 5분을 보냈다. 어머니도 침착하고 담담했다. 하지만 통화를 끝낸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어댔다. 나머지 부스들도 그러했다.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생활관으로 들어와 나의 자리에 앉아 우는 동안 나의 왼쪽에 4명은 다음 전화를 하러 갔다.
많은 사람들 앞임에도 통화를 끝낸 사람들은 아이처럼 울먹거렸고 누군가는 오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생활관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침묵으로 공감하고 격려했다. 우는 이를 이상하게 보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같은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