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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Nov 09. 2023

홧김에 퇴사를 했다

잔여 연차 25일의 허무함

 게을러지지 않으려 아침 운동을 끊었지만 비워낸 만큼 다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지 허겁지겁 폭식을 한 뒤아이스크림까지 입에 문 다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니, 거의 드러누운 자세가 맞겠다. 그리곤 빛바랜 눈빛으로 몇 번이나 봤던 애니메이션을 반복해서 시청하고 있다. 미동도 없이 소파에 드러누워있는 다미의 모습은 마치 TV속의 정지화면 같다. 이와 대비되는 TV속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여름을 배경으로 메밀국수를 해 먹더니 지금은 어느새 겨울로 바뀌어서 전골을 끓여 먹고 있다. 실사가 아닌, 전골 그림이지만 보글보글 거리는 사운드까지 결합되니 제법 맛깔나 보인다. 결국 영상의 유혹에 넘어간 다미는 반사적으로 주섬 주섬 핸드폰을 찾아든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마트 어플을 실행하는 다미 귓가에 왁자지껄 아이들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저런, 벌써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갔구나....'


다미는 휴대폰을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아마 장보기는 새하얗게 잊은 듯해 보인다.) 소파에서 기어 나와 TV를 끄기 위해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목적과 다르게 또다시 TV에 영혼을 빼앗기려는 찰나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원을 끈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원색의 커버로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 유럽 여행 전문서적을 펼쳐본다.


정확히, 10년 직장생활을 한 다미는 두 달 동안 쪽잠을 자면서 프로젝트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해 버렸다. 결국, 모든 에너지를 불태워 버려 더 이상 그 어떤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은 번아웃 상태가 와 버렸다. 그러나 바닥난 에너지와는 반대로 추가 연차는 두둑하게 쌓여있었다. 두어 달 동안 주말과 잠을 반납하며 쉬지 않고 야근을 한 결과였다.


25일.

 

두어 달 동안 정말 죽어라 일만 했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날밤을 샌 뒤 새벽 첫차를 타고 남들이 일터에 향할 때 다미는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겨우 1시간 눈 붙이고 다시 출근하는 이 말도 안 되는 루틴으로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오픈시켰고 다미는 추가 연차 25일을 획득했다. 결승선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다미는 추가 연차 25일을 획득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공허함을 메꿔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날 결국 다미는 퇴사를 통보했다. 몇 달 전부터 계획적인 퇴직도 아니었고, 딱히 다른 목표가 있어서 그만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내 인프라넷에서 자신의 프로필을 누르면 보이는 잔여 연차 25일이 꼴 보기 싫었다.


그렇게, 34살 다미는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을 멈추고 잠시 그늘에 기대어 쉬기로 했다.


정말 쉬기만 하기로 다짐한 다미에게 집콕생활은 안성맞춤이었고 배달음식으로 연맹하며 모든 예능 프로그램을 정주행 했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한 달 만에 배달음식으로 집안 가득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를 잔뜩 들고서 드디어 세상밖으로 나왔다. 정확히 3kg이 늘었고 퇴직금이 입금된 날이었다.


'이렇게 살다 간 돼지가 되고 말겠어'


다미는 예전과 다르게 꽉 끼는 불쾌한 느낌의 청바지에 겨우 몸을 꾸겨 넣고선 단지 상가 내 '기구필라테스'라는 간판을 향해서 들어갔다. 단지 내 필라테스가 얼마나 좋을까 별 기대 없이 들어간 다미는 지금껏 다녔던 곳과 다르게 여유로운 공간에 매료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비용도 회사 건물 내 센터보다 훨씬 저렴했다.


' 이렇게 좋은 곳을 이제야 알았다니!'


점심시간을 쪼개서 갔던 회사 빌딩에 위치한 센터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여유로운 시설을 보는 순간 벌써부터 운동을 한 듯 칼로리가 소비되는 기분이었다. 호기 좋게 주 3회 3개월 그룹레슨권을 결제하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SPA 온라인 스토어에서 깔별로 새 레깅스까지 장만했다. 한 달 만에 집밖으로 나와서 핸드폰 화면이 아닌 사람을 마주하고 소비를 했을 뿐인데 피곤함이 밀려오자 다미는 아늑한 소파로 몸을 던진다.


"아이고, 피곤해라...."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둑해진 거실에서 짹깍짹깍 시계소리만 들린다. 요즘은 무소음 시계도 많이 나온다는데 다미의 엄마가 집들이 선물 겸이라고 챙겨 온 시계의 초침 소리는 매우 정직한 간격으로 규칙적인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십자가와 성경구절이 배경으로 있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자니 처음 독립할 때 꿈꾸던 인테리어는 어디 가고 여기저기 끼어 맞추어 있는 잡다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정신없어."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아버리고 시계 초침소리를 배경으로 소파에 누워 있으니 그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한 직장동료들의 얼굴과 지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계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갑자기 자신이 나약하고 실패자가 된 듯한 우울감이 밀려와 벌떡 일어나서 손바닥으로 볼을 탁탁 친다.


"자자, 이러려고 그만둔 거 아니잖아, 계획을 짜자, 계획을!"


사실 머릿속에 생각해 둔 계획도 없지만, 뭐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책장에서 수첩을 꺼내 일단 뭐라도 적어 보려 하는데 필기도구가 보이지 않는다. "아 오늘은 날이 아니네" 결국 그렇게 수첩을 던져 버리고 또다시  TV앞에 시선을 고정한 다미는 멀쩡한 침대를 두고 그날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아, 또 소파에서 잠들었네, "


찌뿌둥한 목과 어깨를 만지며 다미는 시계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서 아침운동을 갔다. 하루를 길게 보내겠다고 호기 좋게 아침운동을 예약한 자신을 원망하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필라테스 센터로 달려간다. 숨찬다는 게 민망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지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에 첫날부터 지각생이 되기로 다짐한다. 뜀박질을 멈추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여유를 찾자, 출근할 때마다 다미의 어깨를 짓눌렀던 무거웠던 아침공기가 너무나 가볍고 상쾌하게 변한다.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지자 그동안 핸드폰에만 시선을 두느라 존재조차도 몰랐던 여기저기 걸려있는 현수막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평생 교육관에서 진행하는 미술사 강의부터 다가오는 등불 축제까지, 여전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예전에 워킹맘 동료에게서 얼핏 들었던 번개맨 어린이 뮤지컬 홍보 현수막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단지 내에 술집 하나 없고 학교랑 학원만 있다고 좋아하시던 부모님이 기억난다. 독립한 뒤 벌써 4년이 넘어가는데 이제야 본인이 사는 동네의 장점이 눈에 들어오는 다미였다.


'아 내가 꽤 평화로운 동네에 살고 있었구나.'


그제야 고성방가가 아닌 아이들 소리가 시끄럽게 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오며 대단한 깨달음에 달한 것 같은 기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다미였다. 하지만 아침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내 필라테스라고 우습게 봤다가 단단히 큰코다친 다미는 데친 시금치처럼 후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가까운 김밥집으로 향했다.


"일반 김밥 2줄이랑 쫄면 포장해 주세요."


단지 내 상가에 있는 김밥가게로 곧장 돌진한 뒤 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충동적으로 주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게 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허벅지를 두어 번 통통 거리는 순간 곧바로 돌아온 정신이 돌아오고 우물쭈물 계산대로 향해 쫄면을 취소한다. 예상대로 오전 첫 타임엔 예약한 회원이 2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룹레슨의 탈을 쓴 개인레슨을 받고 온 다미는 단 1초도 매서운 강사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직업정신이 투철한 훌륭한 강사 덕분에 스파르타 식으로 1시간 풀로 운동을 하고 나니 뿌듯함과 허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여기서 한 달만 하면 진짜 나도 바디 프로필 찍을 수 있겠는데!'


다미는 그동안 정신없이 지내느라 둘러보지 못했던 동네의 매력을 하나하나 발견하면서 색색의 야채로 꽉꽉 채워져 있는 야채 김밥을 한입에 넣었다. 한 달 동안 텔레비전과 휴대폰을 끼고 살았더니 이제 더 이상 볼 것도 없어진 다미는 혼밥을 하면서 단지 내 상가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서 갔던 시장에서 보이던 특유의 정겨운 느낌이 있는 옷가게들이 몇 군데 보이고, 다양한 이름의 부동산, 학원, 세탁소가 벌집처럼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느 한 공간도 놀리는 공간이 없었고 손님 유무를 떠나서 모든 가게에서 환하게 불빛이 밝히며 장사 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다들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나같이 다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다미는 기억을 더듬어 20대의 자신을 기억해 낸다.


'20대의 내가 꿈꾸던 30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더라....'


그러다가 다미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실 다미의 20대의 꿈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직장인도 아니었고, 엄청난 자산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이 좋아하는 정독도서관 정문옆에 꽃미남 웨이터만 고용해 전통 카페 사장님이 되는 것이었다. 한때 인기 있었던 "커피 프린스"의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보다 저렇게 훤칠한 웨이터들이 있다면 가게 매출은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면서 사장님을 더 부러워했던 다미였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으니 과일차와 전통차만 파는 전통찻집을 열고 싶었다. 30대에 은퇴해 퇴직금으로 정독도서관 옆 땅을 사서 카페를 차리겠다고 다짐했던 대학생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울 땅값은 무섭게 치솟았는데, 과연 자신의 몸값도 그렇게 올랐는지 헛헛한 마음이 드는 다미였다.


'아 오랜만에 세수도 하고 나왔는데, 서점이나 가야겠다.'


사실 잠깐 정독도서관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강북구 끝자락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안국동까지 가려면 대중교통여행을 해야 했으므로, 생각을 바꿔 역 근처 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만의 서점인지 문을 여는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빼곡히 꽂혀있는 각족 서적들에 다미는 학생시절로 돌아온듯한 기분 좋은 향수를 느끼며 발길이 닿는 대로  유유자적 걸어간다. 그러다 베스트셀러코너를 스치다가 발견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신간을 주워 들고 한참을 서서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다 시간이 꽤 흐른 듯 책을 들고 있던 팔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바로 책을 덮고선 계산대로 향해 제책으로 만든 뒤 주위를 빠르게 스캔 후 도서관 내 배치되어 있는 테이블을 발견하곤 그대로 앉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분명히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다미의 경우 하나의 책을 읽으면 또다시 읽고 싶은 분야가 무한가지로 뻗어나갔고 하필이면 이번 베르베르 작가의 신작은 배경이 십자군 전쟁이 배경이었다. 곧 다미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세계사로 향했고, 그다음에는 세계사에 큰 획을 준 약들에 대한 책을 읽어 내려가다가 책의 배경인 유럽으로 넘어갔다. 그와 함께 마음속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고 있는 미세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 유럽여행을 떠나자!'


시작은 커피 프린스 사장이었으나 무섭게 치솟은 서울 땅값에 방향을 바꿔 유럽여행으로 변경된 자신의 30대 목표를 위해 다미는 여행서적으로 유명한 노란 커버로 쌓인 책을 두어 권 집어 들고 고민 없이 결제를 해 버렸다.


다미가 생각하는 자신의 유일한 장점은 일단 하고 싶으면 일단 질러보는 성격이다.


 다미는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전에 한 운동으로 후들 후들 떨리는 팔을 부여잡으며 어제 서점에서 사 온 책을 꺼내 들었다. 독일부터 시작하는 유럽 여행 책자는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유럽에서 시작해서 남유럽으로 넘어가는 루트로 나라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어느새 책 속에 빠져들어 간접 여행을 마친 다미는 마음을 굳힌 듯 독일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곧장 연락을 한다.


다미가 대학 시절에 같은 과 동기로 만난 '김다미'는 다미와 성만 다를 뿐 이름이 같았다. 처음엔 이름도 과도 같아 신기하면서 재미있는,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내향적인 다미와 다르게 '김다미'는 외향적인 성격이었고, 먼저 다미에게 친근하게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렇게 4년 대학시절 내내 거의 붙어 있다가 졸업 후 독일로 어학연수를 간 '김다미'는 그곳에서 아예 자리를 잡고 취직까지 해서 살고 있었다. 매년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볼 때마다 '놀러 가야지, 올해에는 놀러 가야지' 노래를 불렀지만 워낙 먼 나라 인지라 선뜻 도전하기가 어려웠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다미는 유럽 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어서 짧게 동남아나 일본여행만 다녔었다. 바쁜 업무에 치여 살다가 귀중한 연차를 낸 휴가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관광지보단 풀빌라가 있는 휴양지를 더 선호하게 된 다미였다. 하지만 지금 백수인 다미에게는 넉넉한 시간과 10년 동안 다닌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이 있다.


미친 듯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한번 즈음은 도전해보고 싶었던 유럽여행, 다미의 버킷 리스트 한 100번 정도 즈음 끝자락에 위치하는 유럽여행이 단 이틀 만에 결정되었다.


'Hi,  나 놀러 가도 되니?'


별생각 없이 카톡을 보내놓고 아차 싶어서 시차를 계산해 보니 그곳은 한창 자야 하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다. 잠을 방해한 건 아닌지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드는 찰나에 다미의 친구 김다미는 깨어있었는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답변을 보내준다.


'콜! 뒤셀도르프 찍고 빨리 티켓팅해!'


곧바로 구글 플라이트에 접속해 인천공항에서 뒤셀도르프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검색한 다미는 그동안 다녔던 동남아나 일본에 비해 비싼 항공권에 잠시 멈칫한다. 하지만 이는 잠시였을 뿐 그중 경유 시간이 가장 짧고 저렴한 항공권을 예매한다. 가장 저렴한 날짜를 고르다 보니 약 보름 뒤 출발이다. 유럽여행을 보름 만에 준비한다고 하면 모두가 까무러치겠지만 다미는 시간이 많이 남아도 계속 미룰 자신을 알기에 고민하지 않고 바로 클릭한다.


"후아..... 미쳤다, 박다미....."


출국날까지 고작 보름 밖에 안 남은 비행기를 예매한 다미는 드디어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 유럽여행 시 챙겨가야 하는 준비물들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다미의 기약 없는 유럽여행이 너무나 쉽게 시작되었다.


"상비약, 여권..... 흠 더 이상 챙길 게 없는데?"


그동안 길어야 4박 5일 여행이 전부였고 여행 시엔 계획형 스타일이 아닌 다미는, 6개월이나 되는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캐리어에 비상약을 채우고 난 뒤부터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고, 필요하면 여행지에서 구입하기로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옷가지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미니멀 라이프가 최고야, 옷이나 몇 벌 넣고 가지 뭐."


이제 그녀에게 남은 중요한 과제는 단 하나, 바로 부모님께 자신의 퇴사 소식과 여행에 대해서 알리는 거였다. 모임만 나가면 그렇게 입이 닳도록 딸자랑을 하는 부모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려야 하는 다미는 비행기 티켓팅 때보다 더 긴장된 마음으로 자신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따르릉, 따르릉....'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제발 받지 말아라, 받지 말아라 빌다가도, 늦게 말하면 더 서운해하실걸 알기에 오늘 반드시 말씀드려야 한다는 두 개의 마음이 공존하는 다미였다.


"어, 딸, 웬일이야."


아, 결국 전화를 받으셨구나, 실망과 안도가 공존하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다미는 짧게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어떻게 운을 띄울까 머뭇거리는 순간 다미의 어머니가 먼저 회사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 회사는 힘들지 않고?"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옳거니, 하고 바로 기회를 잡고 퇴사 소식을 알리자 잠시 공백이 흐르더니,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되물어 온다.


"어 그래? 어디로 옮겼는데?"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자, 바로 다음 터전을 물어보는 질문을 돌아오자 다미는 역시 우리 엄마 답네, 싶은 마음에 괜스레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고 폭탄 발언을 던지다.


"잠시 쉴 거야, 나 유럽 여행 다녀오려고."

"..... 어,..... 어? 언제? 어디로?"

"보름 뒤 출국이야, 일단 독일에 사는 친구집으로 갈 거고 그다음 행선지는 가서 정할 거야, 6개월 정도 다녀올 거야."


더 이상의 질문을 차단하겠다는 듯, 다미는 장소와 일정을 한 번에 따다다 통보하고 어머니의 답을 기다렸다.


"..... 그럼..... 친구랑 계속 같이 다니는 거지?"

"..... 응 그럴 거야."


거짓말을 했다. '아니야, 엄마. 나 혼자 떠나는 거야, 그 친구는 독일에서만 같이 지낼 거야'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분명 귀국하는 그날까지 두 발 뻗고 주무시지 못할걸 알기에 차마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다미였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다. 준비는 다 됐고?"

"응, 그냥저냥 거의 다 됐어"


그 후 몇 분 간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가 통화를 마쳤다.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고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다미는 고마움과 안도감을 느끼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캐리어로 향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핸드폰에 뜬 은행 어플의 앱 알림과 엄마가 보낸 카톡 메시지를 보고 한동안 캐리어 앞에 쪼그려 앉아 펑펑 운 다미였다.


'3,000,000이 입금되었습니다.'

'딸, 엄마가 많이 보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동안 고생했고 조심히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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