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했으니까 괜찮아요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세요?

by 빽언니

크리스티나는 막 울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촉촉한 눈을 씀벅거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눈동자가 푸른색이니까 외계인이라고 놀리던 한국에서 온 꼬마 개구쟁이 두 명은 그 날 크리스티나를 놀리고 울린 게 들켜서 미국인 교장 선생님 방으로 불려 갔다. 국제학교 초등부 1학년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라 항상 영어 기초공부를 위한 ESL 클래스에 참여해야 한다는 학교 규정 때문에, 첫 3개월은 정확한 레벨 측정을 위해서 다 같이 수업을 한다.

독일 아이인 크리스티나는 다른 나라 출신의 1학년 애들보다는 영어를 곧 잘했다. 영어 구사에 능숙하지 않은 한국인 남자아이 둘은 영어로 말도 별로 안 통하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애들을 돌아가면서 놀리고 울린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악동 놀이까지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또래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악명 높은 꼬마들이었다.


보조교사인 나는 그날 ESL 담당 선생님이 조퇴를 하셨기 때문에 대타로 오후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방에서 돌아와 내 눈치까지 슬슬 보는 걸 보니 두 녀석들이 크리스티나를 울렸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게 하고 아이들을 살피면서 걷다가 크리스티나 옆에 갔을 때 살짝 물어봤다


“아까 속상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괜찮니?”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 oo이랑 ㅁㅁ이가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저는 용서를 했어요. 이제는 괜찮아요.”라고 대답을 했다.


순수한 그 대답에 난 머리를 꽁하고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저들이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하는 말은 타인의 사과를 진심으로 봤다는 거다.

<저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난 용서를 했다>는 건 진심이라면 용서를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난 이제 괜찮다>는 크리스티나의 말까지 듣고 난 내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나이의 어린이는 이런 모습을 보일 때 가장 예쁘구나. 천사처럼 순수한 긍정의 답변을 하는 크리스티나를 보고 사랑받으면서 잘 자란 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아이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할 정도로 아이는 반듯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에게는 사과할 일도 많고, 사과받을 일도 많다. 타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을 때, 우리는 사과를 받고 얼마나 괜찮아졌던가? 상대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용서가 가능했었던가? 그 어렵다는 용서가 가능했다면 용서를 한 후에 마음은 편안해졌었던가?


사과를 받아도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닌 거라고 의심도 많이 하고, 진심 어린 사과인 것 같아도, 그러거나 말거나 너무 분하고 짜증 나서 용서고 뭐고 할 생각도 없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신이 기분 나빴던 그때만을 뇌까리면서 불행의 기분을 재생산해내고 있었던 적은 없는지....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때, 진심이 아닌 사과 액션만을 취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너도 그럴 수 있다고 의심을 할 수 있고, 남들도 나처럼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나 설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여기니까, 주둥이 근육 몇 번 움직여서 하는 사과 따위는 필요할 때 뗐다 붙였다 하는 위기 모면용 액세서리 정도로 여길지도 모른다.


수업을 마치고 크리스티나의 엄마가 픽업을 왔다. 엄마와 손잡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다 말해주고 싶다는 듯이 계속 종알거리던 크리스티나는 나를 보자 “Bye Miss Becky”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대답을 하며 크리스티나의 엄마와 눈인사를 했다. 눈매가 선하고 표정이 좋은 엄마였다.


ㅁㅁ의 엄마는 아들을 데리러 픽업을 왔다가 볼멘소리를 했다.
“베키쌤, ㅁㅁ이 오늘도 교장선생님에게 불려 갔다면서요? 영어 배우는 거 아니면 이런 학교 왜 오겠어요? 자꾸 이러면 애가 너무 기죽을 것 같아요. 다른 학교 알아봐야 하나 고민도 돼요. ㅁㅁ! 빨리 나와!” ㅁㅁ의 엄마는 아이에게 빽소리를 치고 닦달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고개 숙인 ㅁㅁ은 더 작아 보였다

ㅁㅁ은 미국인 교장선생님 앞에 있을 때 보다 엄마 앞에서 유독 더 기가 죽어있는 듯이 보였다.

ㅁㅁ은 크리스티나에게 정말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을까? 사과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생각하게 되는 날이었다. 하루하루 아이들에게서 많은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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