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난 영어에 뿅 가지 않아

Can you speak English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by 빽언니

Can you speak English? 어떻게 들으면 정말이지 이렇게 오만한 말이 있을까 싶다. 영어 할 줄 아세요? 는 영어권에서 살지 않은 사람들끼리 사용하기도 하고, 영어권 출신 인간들이 배낭 메고 전 세계를 영어 하나만 가지고 뻘뻘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아무한테나 싸지르듯이 매일 묻는 말이기도 하다.


영어는 공통 언어로 쓰이지만, 무역을 하거나 국제회의나 유엔 같은 곳에서 그렇게 하는 거지. 현대의 인류만 봐도 일상생활을 영어로 쓰는 인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 할 줄 아세요?” 는 '당연히 영어 해야 하는 거 아냐?', ' 아니, 여태 영어도 못해?'로 폭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영어공부 좀 해야 한다고 걱정스럽게 말하는 친구는, 새해에는 꼭 담배 끊어야겠다고 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체지방을 줄이는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꼭 '영어를 당연히 해야 하는 데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 네가 미국 사람도 아니고 영어 쓰는 직업도 아니고 입시를 할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영어영어 하냐?”

“ 그냥 잘하면 폼 나잖아. 해외여행 가서 써먹어야지”

“ 여행가 보면 물건 파는 사람들 다 한국말하고, 관광지에도 호텔에도 스텝 중에 꼭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영어 쓸 일도 없더라 ”

“ 하하 맞아 그렇기 하더라 ㅋㅋ. 우리나라는 영어 쓸 일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다 영어 하기는 해 그렇지?”

“ 그렇다니까, 자기 계발이니 뭐니 하면서.... 한국말은 개떡같이 하면서... 그냥 패션이야 , 특히 너는 ”


나와 이런 얘기를 나눈 친구도 이번 여름방학에는 6학년 막내아들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영어연수를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냥 멋져 보이니까 영어를 좀 잘하고 싶어서란다


그녀가 즐거움을 찾는 일이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있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영향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도 스물다섯쯤 되었을 때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가신 외삼촌댁에 한 달 정도 간 적이 있다. 첫 영어권 나들이였다. 코쟁이들이 많긴 많았지만 아시아계 얼굴을 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던 기억이 있다. 외숙모가 호주에 가서 살자고 몇 년 동안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간 이민이라 삼촌은 한국을 많이 그리워했다.


“니 외숙모는 얘네 들 똥도 좋아하는 사람이야. 여기 생활 너무 좋아해” 내가 봐도 외숙모는 사대주의적이고 호주에서의 생활을 장단점 다 합해서 다 받아들이고 다 좋아한다. 말끝마다 비교를 하고 한국과 호주 시드니 외에 다른 나라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호주가 최고로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항상 피곤을 달고 사는 삼촌은 택시 드라이버였다. 택시운전을 하는 삼촌은 멜 깁슨이라는 호주 출신 배우를 가장 싫어했다. 언젠가 택시를 탄 손님 중에 멜 깁슨이랑 똑같은 눈깔을 한 놈이 술 처먹고 돈 안 내고 아시아 것 들 다 니들 나라로 가라고 시비 걸고 행패 부려서 저녁 내내 시달리고 고생한 적이 있어서 , 멜 깁슨 같이 생긴 애들은 인성이 다 비슷할 거라는 거다.


삼촌은 밤을 새우고 운전을 한 날에는 다음날 아침에 늦게까지 주무신다. 그날도 외숙모는 알바를 가시고 난 혼자 삼촌이 사는 동네 한 바퀴를 돌려고 집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빌라 같은 4층 건물인데 그곳에서는 플랫이라고 불렀다. 삼촌네는 2층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렸는데 위층에서부터 얌전히 걸어 내려오는 몸집이 작은 젊은 백인 남자를 마주쳤다.


“Can you speak english?”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기회는 찬스다 싶었다. 호주에 왔지만 곧 갈 건데.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백인들은 없으니까 얼씨구나 하고 콩글리쉬 거나 말거나 내가 아는 영어를 총동원했다.


“ 영어를 할 줄 안다. 여기 사냐?”

“ 응 4층에 산다”

“ 아.. 그렇구나, 반갑다, 난 한국 사람인데 삼촌댁에 잠깐 놀러 왔다. 온 지 3일 됐다”

“ 그래, 지금 내가 열쇠를 안 가져와서, 룸메이트도 없고 해서 못 들어가고 있다”

“ 오 ~그래? 그것 참 딱하구나.”

“ 차비 좀 꿔 줄래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갚을게 ”

“ 얼마가 필요한데?”

“ 10달러면 될 것 같아”


나는 지갑을 뒤져보아도 지폐는 20불짜리가 가장 작은 돈이었고 1달러짜리 다 합쳐도 10달러가 안 되는 지라, 그에게 20달러짜리 플라스틱 지폐를 꺼내서 흔쾌히 건넸다.


“ 20달러짜리 밖에 없네. 이걸 받고 저녁에 줄래?”

“ 물론이지. 정말 고맙다. 너 참 영어 잘한다.”


이웃 총각은 내가 준 20달러를 감사히 웃으며 받아 들고 플랫 입구를 나섰다. 곤란에 처한 그의 사정을 다 알아듣고 선행도 한 내가 기특했고, 원어민에게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받았으니 기분이 룰루랄라였다. 삼촌네가 객지 생활에 힘든데 이렇게 이웃에게 선행을 해 놓으면 삼촌에게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오후에 삼촌이 일어나시면 같이 놀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난 근처에 있는 UNSW대학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삼촌은 일어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의 막내 동생이라 나와는 7살 차이밖에 안 나는 삼촌은 오빠처럼 지내서 누구보다 어린 시절 함께한 추억이 많은 삼촌이다.


“ 삼촌, 4층에 사는 애 알아요?”

“ 4층에 사는 꼬마?”

“ 꼬마? 그래도 스무 살은 돼 보이던데요”

“ 4층에는 이혼한 독일 아저씨가 6살 아들 데리고 살아. 젊은 애는 없는데 ‘

” 3층은요? “

” 거기는 지난주에 이사 나갔어. 빈 집이야, 누가 또 들어오겠지 “


그럼 그 20달러 빌려간 놈은 뭔가?

난 오전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삼촌에게 말해줬다


” 하하하 너 당했구나. 여긴 그런 거지들 많아. 너 같은 애들이 표적이라던데. 막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영어로 말 걸어서 사기치고 푼돈 뜯어가는 거야 “


삼촌은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했다. 강도가 아니라 그런 스케일 작은 사기 치는 놈 만나서 다행이라고


” 영어를 다 알아듣고, 영어로 사기까지 당하고 ㅋㅋ. 1:1 수업료 낸 셈 쳐라 허허허. “


난 그 이후로 “Can you speak english?”의 환상, 백인과 영어 솰라 거려야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났다. 삼촌이 멜 깁슨만 보면 자동으로 떠올리는 불쾌감이랑 출발점은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보다 영어를 더 잘하게 된 지금은 오히려 피부 속을 살피게 되었다. 영어는 수단일 뿐. 영어를 잘한다고 그 이유 하나로 누구를 멋지게 보는 일은 절대 없다.


백인 對 <백인 아닌 사람>이 아니라, 사람 對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게 되니까, 어떤 피부색 껍데기를 쓰고 있는지에 별로 좌우되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눈이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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