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리듬으로 살아본 하루
다음날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에서 모임이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듯 해서 나는 연세대 출신이 아님을 밝힌다. 용인에서 신촌으로 가는 일은 늘 애매했다. 거리 때문이 아니라 방식 때문이었다. 차를 끌고 가면 양재부터 막히기 시작하고, 그 막힘은 신촌 근처까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하철을 타자니 청계산입구역에 차를 세워두고 신분당선을 타고, 다시 환승해서 신촌까지 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신촌역에서 연세대까지 걸어가는 길은 또 왜 그렇게 긴지. 겨울이면 그 길이 더 길게 느껴진다.
그날도 그런 고민을 하다 말았다. 밤 열 시쯤이었는데,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가버리면 어떨까.
내일 오후 한 시 모임이니, 오늘 밤에 미리 가서 자고 오면 된다. 밤에는 길이 막히지 않는다. 눈 예보가 있긴 했지만, 지금이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른다. 내일 낮에 눈이 더 쌓이면 그게 더 문제다.
차에 시동을 걸기 전, 먼저 검색부터 했다. 연세대 동문회관 근처에 수영장이 있는지, 가능하다면 공공 수영장이 있는지를 찾아봤다. 공공 수영장은 시설도 깨끝하고, 무엇보다 하루 이용료가 부담 없어서 좋다. 대부분 자유수영이 삼천 원에서 오천 원 정도다. 사설 수영장보다 오히려 관리가 잘 된 곳도 많다. 검색 끝에 서대문문화체육회관이 나왔다. 아침 자유수영이 가능했고,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다.
밤의 도로는 늘 솔직하다. 낮에 그렇게 사람을 지치게 하던 길들이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올라가 내부순환로에 접어들 즈음,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볍게 흩날리더니 점점 눈발이 굵어졌다. 인도와 가드레일 위에는 눈이 쌓였지만 도로는 아직 괜찮았다. 기온은 1도 안팎. 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 도착해 차단기 옆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잠깐 멈췄다. 저녁 여섯 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주차가 무료였다. 그것도 실내 주차장이었다.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는데, 상황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눈 오는 밤에 이만한 공간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차를 세운 시간이 열한 시쯤이었다. 바로 눕지는 않았다. 노트북을 꺼내 일을 좀 했다. 밤이라 그런지 집중이 잘됐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자 어깨가 슬슬 무거워졌다. 그제야 2열을 접고 매트를 깔았다. 이불을 펴고, 알리에서 산 창문 가림막을 하나씩 붙였다. 조명을 낮추고, 음악을 틀었다. 컴프레서는 끄고 열풍만 켰다. 외기 순환으로 돌리고 온도는 23도에 맞췄다.
차 안이 생각보다 훨씬 아늑해졌다.
눈 오는 밤, 실내 주차장, 세상과 살짝 분리된 작은 공간. 그 안에 몸을 눕히니 괜히 마음이 먼저 풀어졌다. 운전도 했고, 일도 했고, 긴장도 했던 하루였다. 누운 지 얼마 안 돼 그대로 잠들었다.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여섯 시였다. 차 안은 고요했고, 주차장 안의 공기는 아직 밤의 온도를 간직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잠깐 밖으로 나갔다. 찬 공기를 한 번 크게 들이마시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다시 차로 돌아와 비요트와 단백질 음료를 조금 먹었다. 배를 채운다기보다는 하루를 시작한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차 안에서 다시 일을 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여섯 시쯤 되자 체육회관 건물이 열렸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일곱 시 사십 분에 자유수영 티켓을 끊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여덟 시부터 물에 들어갔다. 오십 분 동안 천천히 레인을 오갔다.
다니던 수영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물의 감각이 조금 달랐다. 레인의 분위기도 달랐다. 그래서 좋았다. 몸이 물에 적응하는 동안 생각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이 시간만큼은 하루 전체가 아니라 지금의 호흡만 있으면 됐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니 아홉 시가 조금 넘었다. 차로 돌아왔다. 수영을 이용했으니 주차도 몇 시간 더 무료였다. 배가 고파졌다. 근처를 다시 찾아보다가 기사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아침부터 문을 여는 오래된 집이었다. 갈치조림을 시켰다. 갈치가 크고 살이 단단했다. 짜지 않았다. 이런 집은 말이 필요 없다. 조용히, 잘 먹고 나왔다.
차로 돌아오니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한 10시 반쯤 눈을 붙였다. 눈을 뜨니 열한 시 반이었다. 차 안에서 간단히 정리를 하고, 옷도 다시 정돈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으로 출발했다. 차가 조금 막혀서 20분 정도 걸렸다. 결국 열두 시 반쯤 도착했다.
화장실에서 머리도 정리하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모임은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세 시가 되자 끝이 났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도로 상황도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망원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선루프를 열었다. 햇빛이 좋았다. 날은 추웠지만 차 안은 따뜻했다. 한강이 보였다. 그 풍경을 보다가 또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해가 기울어 있었다. 편의점에서 한강 라면을 하나 끓였다. 김이 올라오는 컵을 들고 강을 바라보며 먹었다. 그 후로는 차 안에서 일을 조금 하다가, 여덟 시쯤 도로가 한산해진 걸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아홉 시가 조금 넘었다. 몸은 분명 피곤했는데, 이상하게도 하루가 잘 접힌 느낌이 들었다.
어디 멀리 다녀온 것도 아닌데, 여행을 한 것 같았다.
그날이 유독 오래 남는 이유를 한참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일정은 단순했다. 이동했고, 잤고, 수영했고, 모임에 다녀왔고, 밥을 먹었다. 그 사이사이에 일을 조금 했고, 한강에 들렀다.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게 없는 하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하루는 다른 날들보다 선명했다.
아마도 이유는 속도가 아니라 리듬에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늘 빨리 가려고 한다. 이동을 할 때도, 하루를 보낼 때도 그렇다. 그런데 빠르게 간다고 해서 덜 피곤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막히는 길에서의 한 시간은, 똑같은 한 시간이라도 밤의 도로를 달릴 때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앗아간다. 피로는 거리에서 오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시간에서 온다.
그날 나는 시간을 아꼈다기보다, 시간을 피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대를 피해 움직였고, 모두가 비워둔 시간에 길을 썼다. 밤에 이동했고, 아침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니 하루가 이상하게 늘어났다. 실제로 시간이 늘어난 건 아닌데, 하루 안에 빈 공간이 생겼다. 그 빈 공간이 숨 쉴 틈이 됐다.
차 안에서 자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집보다 불편할 수도 있고, 호텔보다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날 밤은 깊게 잤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공간은 온전히 내가 선택한 공간이었다. 언제 불을 끌지, 언제 음악을 틀지, 온도를 몇 도로 맞출지, 전부 내가 결정했다. 휴식이라는 건 어쩌면 편안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침 수영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낯선 수영장이었고, 낯선 레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물속에서는 비교가 의미를 잃는다. 누가 더 빠른지, 누가 더 잘하는지보다 중요한 건 지금 숨이 가쁘지 않은지, 팔이 물을 제대로 잡고 있는지다. 물은 늘 공평하다. 리듬을 잃으면 바로 알려주고, 다시 맞추면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간다.
모임을 마치고도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돌아가야 할 이유는 있었지만, 지금 돌아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막히는 길 위에서 시간을 태우는 대신, 한강으로 방향을 틀었다. 햇빛을 보고, 잠깐 눈을 붙이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하루에 한 번쯤은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날을 비용으로 계산하면 남는 건 많지 않다. 숙박비는 들지 않았고, 이동도 막히는 시간을 피해 다녔다. 효율적으로 보자면 꽤 잘 짜인 하루다. 그런데 그 하루의 만족감은 효율이라는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아마 이건 여행도 아니고, 캠핑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일상도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감각을 잠깐 엿본 하루였다. 꼭 정해진 루트로 움직이지 않아도, 꼭 모두가 움직이는 시간에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 인생이 직선이 아니라 리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 몸은 분명 피곤했다. 그런데 마음은 묘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루가 흩어지지 않고, 제자리에 잘 접힌 느낌이었다. 아마 그게 이 하루가 오래 남는 이유일 것이다.
어디를 갔느냐보다, 어떻게 하루를 통과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날은 굳이 말로 정리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