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잡는 칼 말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는 속담이 있다. 작은 일을 처리할 때 지나치게 큰 수단을 쓸 필요가 없음을 경계하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의 뜻을, 닭 잡는 데는 닭 잡는 칼을 써야 하고, 소 잡는 데는 소 잡는 칼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결국 닭 잡는 칼과 소 잡는 칼 모두가 세상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코딩 관련된 유튜브 영상들을 여럿보다 느낀 점이 있다. 댓글들을 쭉 살펴보면, 아무래도 초보자들이 많이 보는 영상이다 보니 초보자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발자의 현실을 언급하며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많았다. 흔히 네카라쿠배로 이야기되는 IT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재능이 필요하며, 대부분은 SI 중소기업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맞는 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교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교사 생활 하면서 틈틈이 배운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큰 기업 같은 곳에는 취업이 어렵고,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가능하겠냐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절대 프로그래밍을 잘하거나 재능이 있어서 그 길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이 나이에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네카라쿠배 같은 곳에 갈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리고 나도 그런 곳에 가고픈 마음도(사실 불러만 준다면..) 없다. 다만 프로그램 만드는 일이 재미있고 나 같은 사람이 만드는 사소한 프로그램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길을 택했을 뿐이다.
모두가 소 잡는 칼일 수 없고 특히 나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이나 쓰일까 말까 한 소 잡는 칼 보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쓰일 닭 잡는 칼이 나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대단한 프로그램의 개발자도 물론 보람되겠지만, 간혹 내가 만든 사소한 프로그램도 소중하게 사용해 줄 사람만 있다면 충분한 보람이 되는 것이다.
연매출 몇 억 하는 대형 맛집의 사장도 좋고, 연에 몇 억 씩 받는 유명 개발자의 삶도 좋다. 그림 한 편에 수십억씩 하는 예술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상상도 간혹 하곤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 같은 사람이 간혹 점심에 밥 차리기 귀찮을 때 편하게 찾을 수 있는 동네 식당도 필요하고, 저렴하게 만들어 간단히 쓸 프로그램을 만드는 나 같은 개발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광지에서 우연히 만날 나와 똑 닮은 초상화를 그려줄 캐리커쳐 화가분도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닭 잡는 칼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자주 찾아줄 소소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