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료 시스템의 특수성과 규제를 이해해야 한다
앞서 충분히 지불의사를 가진 니즈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단순히 '지불의사'와 '니즈'에 더해서, 반드시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의료 시스템의 특수성, 특히 한국 의료 시스템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무척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꼭 필요한 것을 만들어도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구조적으로 돈을 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요하더라도 돈을 지불할 주체가 없거나, 혹은 누군가 지불의사가 있더라도 시스템상 지불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혹은 필요하지만 규제에 걸리거나, 보험 적용이 안되거나, 보험 적용이 되어도 제조 원가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헬스케어 분야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성공적인 헬스케어 스타트업이 배출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다른 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한국만의 고유한 의료 시스템과 규제, 보험, 지불제도 등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의료 전달체계나, 단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신의료기술평가, 보수적 수가체계, 문재인 케어 등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수한 여건이다. 또 어떠한 경우, 이러한 의료 시스템의 특징은 명문화된 규정이라기보다,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미묘한 역학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실 이것들을 상세히 설명하려면 그것만으로 책 한 권이 따로 필요하다. (의료 시스템에 대한 설명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혹시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청년의사 박재영 주간의 ‘개념 의료’라는 책을 추천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것만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고유한 의료 시스템, 예를 들어, 의료 전달체계, 단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신의료기술평가, 문재인 케어 등이 당신의 사업에 영향을 주는지의 여부, 혹은 영향을 어떻게 얼마나 미칠지의 여부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준비가 덜 되어도 한참 덜 된 것이다. 사업의 성공 여부 정도가 아니라, 사업의 존폐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지 못한 창업자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단적으로 의료기기 사업을 준비하면서 ‘심평원'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창업자도 필자는 종종 만난다.
만약 처음부터 한국 시장이 아닌 해외 시장을 목표로 한다면, 한국 특유의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진출하려는 해당 국가의 의료 제도의 특수성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 의료 분야의 특수성 중에 규제는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려고 한다. 헬스케어 혹은 의료는 근본적으로 규제 산업이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기 때문에 지켜야 할 규제들이 도처에 있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의료 산업의 수준은 결국 규제의 수준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규제를 넘어서는 의료 산업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을 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사업이 어떠한 규제의 영향을 받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규제 산업인 헬스케어 분야라면 더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규제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앞서 말했듯 사업의 존폐 여부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본인이 법적인 처벌까지 받을 수도 있다. [1, 2]
디지털 헬스케어의 급속한 변화와 혁신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규제기관에서는 관련 부서를 신규 설립하고, 완전히 새로운 규제 방식을 고안하는 등 의료기기를 규제하는 방식 자체가 발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FDA가 내어놓은 ‘디지털 헬스 이노베이션 액션 플랜’에 따른 사전 인증 제도(Pre-Cert)와 같은 변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ref] 디지털 헬스케어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기술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기 위해서는 규제 기관 역시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에 이는 그저 외국의 이야기일 뿐이다. 한국은 아직 헬스케어 분야의 규제 개선이나 국제 규제와의 동조화가 미진한 국가이다. (footnote: 참고로 필자는 규제 ‘완화’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필요한 규제는 당연히 해야 하고, 불필요한 규제는 줄여야 한다. 꼭 필요하다면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규제 합리화, 규제 개선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식약처, 심평원 등 규제 기관에 근무하시는 분은 다른 의견일 수도 있으나, 산업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속도나 변화 정도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중론이다. 한국형 Pre-Cert와 같은 논의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FDA와 같은 디지털 헬스케어의 혁신이나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은 별로 없어 보인다.
더 단적으로 언급하자면, 해외의 많은 혁신 사례들이 한국에서는 그저 불법이다. 원격 진료, 원격 환자 모니터링, 의약품 배송, 유전자 DTC 검사 등이 그러하다. 2018년 필자도 함께 참여했던 KPMG의 조사 결과 상위 100개의 글로벌 헬스케어 스타트업 중 63개가 (투자액을 기준으로 보자면 75%의 경우가) 한국에 진출할 경우, 전면 불법이거나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불법으로 나왔다. [ref] 한 마디로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미국에서 잘 되는 사업이라고, 한국에서 그대로 들여오면 대부분 불법이라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해외의 유망 사업 모델을 그대로 국내로 옮겨와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으나, 헬스케어는 대부분 그런 방식이 불가하다.
이러한 규제를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개 스타트업과 창업자의 입장에서는 규제를 바꿀 힘도, 리소스도 없다. 기존 시스템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창업자의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창업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필자와 같은 업계 전문가들은 비합리적인 규제나, 기술 혁신에 따른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면서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 2, 3] 식약처와 심평원의 협의체에 속해서도 열심히 의견을 내고 있다. 하지만 일선 창업자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창업자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규제를 자신이 혁파하겠다거나, 막연히 규제가 조만간 바뀔 것이라고 낙관적인 기대감을 갖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은 규제가 바뀌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사업을 구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실 규제 개선의 이슈는 일선 창업자보다는 규제기관과 관련 당국의 문제이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로운 스토리가 하나 있다. 필자가 운영하는 회사는 성균관대학교와 함께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난 몇 년 동안 헬스케어 해커톤을 개최하고 있다. 의료인, 개발자, 디자이너 등이 모여서 1박 2일로 밤을 새우면서 헬스케어 관련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가능하면 프로토타입까지 만드는 행사이다. 필자와 다른 전문가들이 밤늦게까지 참가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조언하며, 마지막에는 심사를 통해서 우수팀을 선정한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해커톤을 1박 2일 일정으로만 진행하다가, 작년부터는 팀을 한 달 전에 미리 구성해서 아이디어를 ‘사전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해커톤에서 제안된 아이디어가 대부분 ‘한국에서는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참가팀 상당수가 원격진료 등 불법 아이템을 가져오니 심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행사 한 달 전에 아이디어를 미리 제출하도록 해서, 불법의 소지가 있는 경우 피드백을 주고 다른 아이템을 찾도록 했다. 개탄스러우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