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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maflower Jan 23. 2019

구딸 파리 엉 마뗑 도하주

비에 젖은 새하얀 가드니아


우리나라에 살면서 버가못, 자스민, 튜베로즈, 일랑일랑, 미모사, 패츌리 등의 식물에 익숙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입사 후 천연 향료를 공부하면서 왜 그라스(Grasse) 출신의 뛰어난 조향사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꽃과 허브가 지천으로 널린 그라스에서 나고 자란 그들과 달리, 살면서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식물의 향을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향들은 또 어찌나 비슷비슷한지... 그중에서도 자스민, 오렌지 플라워, 튜베로즈 등은 화이트 플로럴(White floral)이라는 하나의 계열로 묶이는 만큼 닮은 구석이 많았다. 화려하고 달콤하고, 어딘가 모르게 중독적인 뉘앙스까지. 꽃 자체가 생소한만큼 향을 구분하기도 어려웠지만, 그 화려하고 관능적인 느낌이 어쩐지 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브루고뉴 퍼퓸클래스에서 각 화이트 플라워들의 특징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 빅토리아 덕에, 화이트 플로럴 향을 전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눈치챘던 건지, 빅토리아는 좋아하는 향 계열만 고집하지 말고 조금씩 경계를 넓혀 다양한 향들을 경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면 조금씩 마음이 가는 것처럼, 그 때 이후로 화이트 플로럴 향이 정말 좋아진 것 같다. 너무 달거나 진한 향은 아직 무리지만, 요즘처럼 추위가 매서운 날은 부드럽고 은은한 화이트 플로럴 향을 통해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다.


빅토리아가 나와 같은 화이트 플로럴 입문자를 위해 추천한 향수가 있다. 바로 구딸 파리의 엉 마뗑 도하주(Goutal Paris Un Matin d'Orage). 그녀가 특별히 결혼식에 사용했던 엉 마뗑 도하주는 '폭풍의 아침'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설렘과 긴장으로 뒤엉킨 당시 그녀심정을 너무나 잘 표현해 준 향수였다고 한다.


엉 마뗑 도하주이름 그대로 거센 폭풍이 지나간 아침, 비에 촉촉이 젖은 새하얀 가드니아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향이. 로맨틱한 결혼식의 기억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엉 마뗑 도하주가 불러일으키는 기억이 하나 있다.


 

엉 마뗑 도하주 (이미지 출처: goutalparis.com)


2011년 여름, 국내에 자생하는 가드니아(열매치자)의 꽃향을 포집하기 위해 남해로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가드니아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새하얗고 보드라운 꽃잎에서 어쩌면 그렇게 달콤하고 강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지 놀라웠다.


복숭아처럼 달고 코코넛처럼 부드럽고 밀키(milky)한, 이토록 이국적인 향을 남해에서 만날 줄이야.


꺾지 않은 꽃을 유리관에 잘 넣고, 공기를 흘려보내면서 꽃의 향 성분을 특수한  포집하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날 오후 두 번의 실험을 마치고 다음 날 아침 세 번째 실험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밤부터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내리면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흙과 풀 냄새가 강해져 순수한 을 포집하기 어렵다. 하지만 보통 햇빛이 강하지 않은 아침에 향이 더 강한 편이라, 실험 장치를 비닐로 싸고 우산을 덮어 겨우 겨우 실험을 마쳤다. 비에 젖은 가드니아를 한 아름 꺾어 옆 좌석에 싣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 퍼지는 축축한 공기와 달콤한 가드니아의 향이 내내 코 끝을 맴돌았다.

 

비가 쏟아지던 날, 남해에서 만난 가드니아


엉 마뗑 도하주의 첫 향은 남해에서 만난, 물기를 머금은 싱그러운 가드니아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아침 공기처럼 상쾌한 레몬향과 복숭아 껍질 같은 보드라운 달콤함, 무엇보다 워터리한 그린 노트가 자칫 인공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가드니아의 첫 인상을 세련되게 다듬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드니아의 달콤하고 크리미(creamy)한 향이 한층 더 풍성해지지만, 투명워터리 노트(아마도 매그놀리아)가 향의 빛깔이 너무 짙어지지 않도록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잡아준다. 향이 많이 무겁지 않은데도 부드러운 잔향은 꽤 오래가는 편이다. 


엉 마뗑 도하주를 맡을 때마다 비에 젖은 가드니아 꽃밭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물기 머금은 화이트 플로럴 향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폭풍을 견뎌낸 꽃의 강인함이 느껴져 더 사랑스럽다.


평소 화이트 플로럴 향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꼭 한 번 시도해보면 좋겠다. 혹시 결혼식을 위한 특별한 향수를 찾고 있다면 더더욱.






엉 마뗑 도하주는 레몬, 차즈기 잎(시소), 진저, 자스민, 가드니아, 매그놀리아, 샌달우드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30ml 1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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