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일이 힘들었고, 사람이 힘들었고, 당연히 마음도 힘들었다. 글을 쓰기는커녕, 향을 맡을 여유 조차 남아있지 않은 채 무기력한 일상을 살았다.
궁하면 구한다고 하더니, 인생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필요한 선물을 가져다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우연히 만난 한 권의 책과 하나의 향수가 바로 그 선물이었다.
책 '위대한 멈춤(박승오, 홍승완 저)'은 언뜻 실패로 여겨지는 멈춤이 사실은 위대한 전환기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멈춘 자리에서 치열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야 말로 더 큰 도약의 밑거름이라는 것을 배우고 나니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치열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힘이좀처럼생겨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조바심이 나를 옥죄면서, 무언가 해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무엇도 할 수 없는늪에 빠지고 말았다. 향을 다루는 일, 새로운 향수를 맡는 일에도흥미를 잃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귀국한 동생이 루이비통 매장에서 받은 르 주르 스레브(Le Jour Se Lève) 샘플을 건네주었을 때도시큰둥하기만 했다.평소의 우울한 기분대로였다면 아마 박스를 열지도 않은 채 화장대 서랍 속 다른 향수 샘플들과 함께 처박아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순간, 향수의 이름이 마음을 움직였다. Le Jour Se Lève. 우리 말로는 동틀 녘.
자욱한 어둠 속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나에게,동틀 녘 한 줄기 빛은 너무도 간절한 것이었다.그 뜻을 알고 나니 향을 맡아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루이비통 르 주르 스레브 (이미지 출처: https://boutique.humbleandrich.com)
르 주르 스레브는 시트러스 플로럴 계열답게 여기저기 통통 튀는 활기로 가득한 향이다. 상큼한 오렌지, 만다린, 버가못, 레몬의 시트러스 믹스와 상쾌한 그린 노트, 딱 알맞은 정도의 달달함을 얹어주는 카시스까지, 어디 하나 모나고 어두운 구석 없이 밝고 기분 좋은 향이 펼쳐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오니, 자스민 삼박, 오스만투스의 깨끗한 플로럴 부케는 상큼한 탑 노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잔향 역시 처음의 밝은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이어나가는 데 충실하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좋은 향이다.
제품 가격을 고려하면 가볍고 심플한 향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첫 스프레이 하는 순간의 짜릿함이 아쉬움을 만회하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다.무엇보다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순수함이 참 좋았다.
간만에 햇살처럼 밝은 향을 맡고 나니 ‘오랜만에 향수 리뷰를 써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나도 모르게 조금 기운이 났다.
다행히 어두웠던 마음을 직시할 용기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무기력함, 우울감은 증상 그 자체가 아니라 반드시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나의 무력감이 가리키고 있는 곳엔 아니나 다를까, 온전한 불안감이 숨어 있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향수에 대한 애정을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다.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항상 잘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늘 불안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엔 그 불안이 현실이 될까 봐,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던 모양이다. 그냥 이유 없이 모든 게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무의식 속의 방어기제가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걸 깨닫기까지 일 년이나 걸렸다는 게 허탈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욱 명확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전부 다 놓아버리고 싶은 우울감도, 다시 한 걸음내디뎌볼까 싶은 용기도 결국 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내게 의미가 있는 단 하나의 일, 그 일을 잘 해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말이다.
Le Jour Se Lève.
이름만으로 위로를 주는 향수를 만났다. 동틀 녘 햇살 같은 향수 덕에 내 마음에도 다시 아침이 시작되려 한다.
루이비통 르 주르 스레브는 이탈리아산 만다린, 버가못, 블랙커런트, 자스민 삼박, 피오니, 오스만투스, 인센스, 머스크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100ml 35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