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359일차]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또 한 번의 죽음을 만나다.

by 김연필

친구의 할머니가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전해듣고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경사는 챙기지 못하더라도 조사는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냈지만, 전라도 광주까지 가기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회사 대표도 친구라 함께 갔다 올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몇번째 맞이하는 죽음인가?

어느샌가 장례식장에 가는 것이 익숙해져있다.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슬픈 장소에서의 행동을 알게 된 것도 같아 조금 서글프다.


어쩌면,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을 위로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잠시, 마음속의 슬픔을 나의 위로로 덮어서 조금이나마 상대가 느끼지 못하게 혹은 덜 느끼게 할 뿐이다. 이별의 슬픔은 망각할 뿐이지 극복되지 않은 것만 같다.


몇년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면서 호전되었다가 악화되기를 반복하시다가 결국 떠나셨다고 했다. 마지막 가시는 순간의 모습을 보지 못 한게 친구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어느정도 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잘 참고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도 찾아오고, 전화도 받아야 하고, 친척들과 이런저런 내용도 조율해야 하는 등 바쁘기 때문인지,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래도 떠나시기 전날 카메라에 할머니의 모습을 담아 둘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보고 싶거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언제 보고 싶어질까?'


딱히 해줄 수 있는 답이 없다. 수시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워할만한 상황을 만나기만 하면 저절로 보고싶어진다. 확언할 수 없지만, 동네어귀에서 손자와 놀고 있는 할머니를 보게 된다거나, 평소 할머니가 자주 해주던 어떤 음식을 먹게 된다거나, TV나 영화 같은 미디어매체에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거나 하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냥, 이유도 모르게, 불쑥, 불쑥 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문득,

나의 부모님 두 분은 세상을 떠나기전에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을지 궁금해졌다. 엄마의 경우는 사고 후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8살짜리 꼬마에게 그저 비보가 날아왔을 뿐이다. 아버지의 경우는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나와 동생을 찾았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렇지만 따로 남겨진 말은 없다.


할머니 가시는 길 마지막까지 잘 모셔다 드리고 서울에서 보자고 하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하여 깊은 밤을 달려 서울로 간다.

한치 앞도 모르는게 인생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내 삶의 헤드라이트는 어딜 비추고 있는가?

나의 삶에서 서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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