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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애니메이션인가.

애니메이션의 가치를 묻는 사람들에게.

스튜디오 지브리가 '바람이 분다'를 제작할 당시 촬영되었던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 (2013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촬영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라는 것도 결국에는 취미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애니메이션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주받은 꿈을 꾸는거에요. 우리 모두가 그래요."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남긴 이 말의 의미를 계속 되내었고, 이 말은 결국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 애니메이션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심상들이 다를 것입니다. 삶에서 애니메이션이 차지했던 부분과 목적도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오락거리로, 어떤 이는 배움의 수단으로, 누군가는 예술적인 목적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애니메이션을 바라볼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에서 나오는 다양한 질문들을 제쳐두고, 애니메이터로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문제들은 다음 두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1. 굳이 다른 매체가 아닌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애니메이션이 돈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엔지니어링 산업과 바이오산업과 같은 산업만큼 중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을 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커리어로 선택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돈이 안된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산업 디자인이 더 돈을 많이 버니 그쪽으로 가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분들께, 애니메이션이라는 커리어를 선택한 것이 취향을 따라 충동적으로 결정한 단순한 선택이 아니며, 돈을 잘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만든 이기적인 선택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발생한 질문이었습니다.


위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제가 낼 수 있는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생존과정 최적화 도구.

애니메이션은 생명의 생존과정을 최적화하는 도구입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커리어가 가지는 본질적인 의문은 모두 인간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 3가지 요소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식자재를 생산하고 운반하고 조리하고 소비하고 처리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보면 농업, 화학업, 유통업, 조리업, 폐기물처리업, 바이오에너지산업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산업과 애니메이션 산업이 없다고 해도 생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존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명유지의 단위가 개인에서 기업과 산업, 그리고 국가로 넘어갔습니다. 기업과 국가의 생명유지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시스템과 노동자가 경쟁자보다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효율성을 결정짓는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기업과 소비자간, 기업과 기업간, 기업과 정부간, 기업 내 부서간, 국가와 국가간의 소통이 이루어질 때 생산, 소비, 교역, 비축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통과정은 어떻게 최적화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사람은 시청각, 후각, 미각을 통해서 복합감각적으로 상황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후각과 미각을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는 행동은 때로는 생명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자연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각적인 정보로만으로도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면 생존에 더 이로울 것입니다. 짧은 시간안에 시청각정보를 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텍스트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더 효과적입니다. 청각적인 정보전달은 기록적인 가치는 떨어지지만 사람간의 상호작용에서 텍스트보다 더 빠르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시각적인 정보 전달이 불가능할 때도 청각적인 신호는 보다 멀리서도 정보전달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과 청각을 결합한 매체인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상황에 대한 정보전달에 가장 효과적인 매체입니다. 많은 상업적 영역에서 실사영화, 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이 활용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하는 이유라는 질문에 답해 보겠습니다. 애니메이션이 경쟁 매체인 영화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는 부분은 체험적인 영역이 아닌 추상화와 상징화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화에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만화가 우리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단순화된 정보가 주어졌을 때 그 정보의 여백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때문입니다.

Fig. 1. Illustration from 'Understanding Comics' by Scott McCloud.

'Understanding Comics'(만화의 이해)의 저자 Scott McCloud (스콧 맥클라우드)는 우리 인간의 얼굴이 실사화로 그려졌을 때보다 점과 선으로 단순화되었을 때 정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만화가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데 다른 실사 매체보다 더 효과적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애니메이션은 현실 공간이라는 제한을 뛰어넘어 현실인식을 증강시키는 소통매체로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예시로 김성영 픽사 레이아웃 아티스트께서 제작한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 분석 영상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단순화 된 캐릭터와 효과가 등장하는 2D 애니메이션이 사용하는 프레임 수는 실사에 더 가까운 3D 애니메이션이나 실사 영화가 사용하는 프레임 수 보다도 적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을 저주받은 꿈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며, 소통의 기능보다 오락과 경제적 가치 창출이라는 기능에 현대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기초를 두고 발전해왔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돈과 시간에 얽매여 있습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안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실 세계의 일과 분리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외교,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애니메이션 안에서 다룬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의 문제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의견 교류에 기여할 수 있음에도,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그저 애니메이션으로서 남아있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의 존재 목적을 해석하고, 분석해서 가치를 입증해내기보다는, 스크린 앞에 앉아서 잠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장소로 마음을 옮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며 살아갈  있다면, 그것이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애니메이션을 관객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매체로서보다 모두들의 마음 속 한 켠에 남은 좋은 기억조각으로서 바라볼 때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글을 마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역사적 거장 애니메이터 중 한 명인 리처드 윌리엄스의 애니메이션 서바이벌 키트를 한국어로 다시 써보는 글을 연재할 생각입니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사진 속 앞 산에는 봄비가 내리고 따뜻한 햇살이 비추어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진달래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반가운 봄이 찾아온다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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