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기억의 공간들 #02 노트르담 전망대
혼자 하는 여행은 외로운 만큼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게 하고, 그만큼 좋으면서도 지친다. 호텔에 돌아오면 하루종일 걷느라 혹사당한 다리의 통증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하루종일 시달리느라 쌓인 스트레스, 사소한 불안, 오해, 설렘과 불쾌감 등이 뒤섞인 피로로 인해 바로 침대로 쓰러지기 일쑤다.
2013년 3월, 6년을 다닌 첫 회사를 때려치우고 파리로 향했다. 그해 3월의 파리는 유독 추웠다. 이상 저온이라고 했다. 하루종일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로 인해 나는 감기에 된통 걸리고 말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목이 칼칼하다. 집에 있는 전기장판이 너무 그리운데, 파리의 호텔에는 전기장판은 커녕 온풍기도 없다. 최대한 뜨거운 물로 조금 긴 샤워를 한 후 종합감기약을 먹고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켰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어느샌가 이불 속에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니 새벽 1시. 잠들기 직전, 이런 몸 상태로 과연 내일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최대한 실내로만 돌아다녀야 하나, 내일모레 엑상프로방스는 어떻게 가나 생각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아침이 오기까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내일 계획을 하나도 안 세웠다. 계획하고도 가지 못했던 곳들이 있어 남은 일정들 속에 끼워넣고 조율을 해야 한다. 목은 여전히 칼칼하고 몸상태가 그닥 나아진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내일은 어디를 가지 생각하니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겨우 몇 시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호텔로 막 돌아왔을 때 느꼈던 피로를 내일에 대한 기대가 금세 덮어버리고는 나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결코 불가능한 얘기다. 주말에 약속이 있지 않고서는 집에서 잘 나가지도 않고 폐인놀이나 하는 내가, 그 모든 귀찮음을 무릅쓰고 기어코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그 설렘 때문일 거다.
어쩌면 가장 춥고 피곤했을 하루를 끝내고, 나는 또 다시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가벼운 감기 기운을 매달고서 이런 글도 끼적거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오늘은 햇빛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March 25, 2013 05:09 AM
노트르담 전망대
파리에는 여러 번 갔지만 노트르담 전망대에 올라간 것은 단 한 번뿐이다. 그래서 내게 노트르담 전망대는 그 한 번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상 저온으로 너무나 추웠던 3월 말, 오픈 시간에 맞춰서 나름 이른 시간에 전망대에 도착했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성수기가 아니니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는 큰 오산이었다. 파리지앵들이 다른 곳으로 휴가를 떠나지 않고 모두 파리에 남아있어서일까. 3월의 파리는 어딜 가든 끝도 없이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노트르담 전망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리 뮤지엄 패스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날이라 선택의 여지 없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전망대 줄을 서는 쪽은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그늘이라 너무나 추웠고, 아무리 기다려도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몇번이나 포기하고 그냥 갈까 고민하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차례가 되었을 때는 온몸에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얼어붙은 몸을 녹일 새도 없이 전망대 계단을 올라가서 도착한 곳은 또 다시 바깥이다. 아직 몸은 얼어있고, 노트르담 전망대가 보여주는 파리 시내의 풍경을 담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랜 시간 추위에 떨었던 만큼 따뜻한 실내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파리 시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얼어붙어 감각도 없는 손을 호주머니에서 빼내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한시간 반을 추위에 떨었던 거구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파리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친구가 자신이 생각하는 파리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생각하는 파리의 이미지는 영화 '라따뚜이'에 나오는, 노트르담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풍경이라고 했다. 만약 자신이 파리에 가게 된다면 아마도 그 풍경을 보기 위해서일 거라고.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문득, 노트르담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의 풍경을 떠올렸다. 나는 '라따뚜이'는 본 적이 없지만 노트르담 전망대에는 올라가보지 않았던가. 그 엄청난 추위와 싸우면서.
친구에게 이 사진을 보여줬더니 바로 이 풍경이라며 무척 좋아했다.
이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파리를 대표하는 하나의 장면인 것이다.
단 하나의 풍경을 위해 여행자들은 몇 시간이고 기꺼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더위도 추위도, 다리의 통증도 참는다. 일상에서라면 긴 줄을 발견한 순간 '다음에 오지 뭐'하고 돌아서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 풍경이 바로 그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단 하나의 풍경'이라는 것을 안다. 만약 내가 그때 추위를 참지 못하고 포기해버렸다면 나는 이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기억하는 파리의 풍경들 속에 이 장면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고 영화 '라따뚜이'에서 이 풍경을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내 눈으로 담은 풍경이 아닌 이상 그것은 수많은 풍경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다림의 시간 끝에 단 하나의 풍경을 만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