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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cilk Jun 05. 2017

익숙함과 낯설음이 공존하는 기억의 도시

정수복, 『파리를 생각한다』

2010.08.25



파리를 생각한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컸던 스물한 살의 첫 해외 배낭여행, 가는 곳마다 한국 사람들이 득실거리던 여행사 패키지 일정, 그다지 마음이 맞지 않았던 일행들, 온몸을 축축 늘어지게 하던 뜨거운 7월의 햇빛. 그 서툴렀던 여행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낯설고도 익숙했던 도시, 파리.


모든 것에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만나는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꺼내 보이듯, 여행지 역시 계절에 따라, 혹은 그 여행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기억 속에 자리잡는다. 같은 시간 같은 곳을 걷고 있어도 각자가 기억하는 느낌과 잔상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기억'이 그러하듯, '여행' 역시 지독히 각자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파리를 생각한다』는 사회학자 정수복이 파리에 대한 책들 속에서 찾아낸 사실과 정보들을 자신이 직접 파리를 발로 걸으며 느끼며 생각한 것들과 함께 녹여낸 인문한적 파리 산책기이다. 14년째 파리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 책에서, 그 동안의 산책을 통해 얻은 성찰과 사색을 바탕으로 문학과 예술, 역사학, 지리학, 인문학, 철학, 사회학 등의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리를 이야기한다.


화려함을 좇는 이들에게 파리는 겉으로는 비위를 맞추지만 결코 자신의 속내는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화려한 관광지로 가득한 파리의 중심부보다는 주택가가 모여 있는 파리의 주변부를 걸을 것을 권한다. 도시에서 홀로 걷는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것들까지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플라느리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걸음을 옮김으로써 그 곳의 사람들과 일상의 공간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가정집에서 새어 나오는 음식 냄새, 개 짖는 소리,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까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만나게 되는 모든 풍경이 그 도시이고, 그 곳 사람들이며, 또한 자기 자신이다.

저자는 파리의 좁은 골목길이나 언덕길들을 걸으면서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파리의 거리에는 지나간 시간들의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울은 전쟁과 근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기억의 장소'를 잃어버렸다. 오로지 편리하고 새롭고 현대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서울에는 기억이 없다. 옛 것은 자취를 감추고 모든 것은 새 것으로 교체된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그 세월의 이끼가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파리가 기억의 도시라면 서울은 기억상실의 도시인 것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서울에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커다란 단절을 느꼈던 저자는 낯선 파리의 거리에서 유년시절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에게 파리를 걷는 일은 유년시절의 자신, 혹은 자기 내면과의 대면이다.



런던 인 파리 아웃.

파리는 한 달 가까이 계속되었던 스물한 살의 유럽 배낭여행 중 마지막 도시였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자신이 생각하거나 기대했던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이 발견되면 쉽게 실망하고 불평하던 일행들과 처음으로 헤어져 혼자서 걸었던 도시가 파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진작 혼자서 여행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꽤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파리에서의 둘째 날, 좀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겠다는 일행들과 헤어져 전날 대충 둘러보았던 파리를 혼자서 다시 걷고 또 걸으면서 느꼈던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윤상의 앨범을 들으며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문 퐁네프를 건너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몇 시간이고 그림을 쳐다보고,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런, 마치 평범한 일상과도 같았던 하루. 그 날의 파리는 다른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만의 파리가 되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쩌면 파리에 대한 환상이 파리를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느껴지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파리는 파리 자체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이미지들의 집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이 늘 그러하듯 파리에도 불평거리들이 넘쳐난다. 거리는 개똥이 많아 지저분하고 영어가 잘 통하지 않으며, 인터넷 속도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느리다. 하지만 파리에는 과거의 기억을 환기하는 장면들이 있다. 청계천과 피맛골의 흔적은 사라져가고 숭례문마저 불타버린 서울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 놀던 놀이터나 골목길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주 후면 나는 다시 파리로 떠난다. 수년 전 스쳐 지나가듯 잠깐 걸었던 그 거리를 걷고 또 걷기 위해 간다. 막상 파리에 가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그저 낯선 곳에서 일상처럼 걷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서울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의 일상 속에 불쑥 끼어들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그렇게 걷고 싶다. 그 걸음 속에서, 저자가 말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파리의 멜랑콜리'를 만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리 거리 한복판에서 기억상실의 도시 서울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낯선 도시 파리,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풍경일 도시 파리를 걸으며 나는 서울에 두고 온 나의 일상을 떠올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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