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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cilk Jun 05. 2017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위하여

김영주, 『뉴욕』

2008.09.12



1.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을 그저 까닭 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 이상의 <날개> 중에서
 
세상 물정의 발꿈치만큼도 모르면서 어른들의복잡 미묘한 심리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10대 중반, 나는 이상의 『날개』를 읽고 '권태'라는 감정이 어떤 건지 드디어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구절에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 요구마저 오리무중이다. 뉴욕과의 권태기에 빠진 지 오늘로서 닷새째다,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데도 없이 방구석에 빈둥거리며 식물인간처럼 지냈다. 해가 기울어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오늘이 곧 지날 테니.
- p.165
 
3년 전 도쿄에서 1년간 산 적이 있다. 떠나기 전에는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살 생각에 걱정보다는 설렘이 더 컸지만, 그저 잠깐 ‘일탈’로서 스쳐 지나가는 것과 오랫동안 머물며 ‘일상’이 되는 것은 달랐다.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 적극성은 나날이 퇴색되어 가고, 나는 그렇게 조금씩 ‘펀둥펀둥’ 게을러져만 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도쿄의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걷고 또 걷고, 보고, 느끼고, 이야기 하리라던 다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나는 기숙사 방안에 틀어박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그립다 종로, 홍대앞, 선유도’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떠다. 낯설었던, 그러나 더 이상 낯설지 않아진 도쿄로부터 또 다시. 매일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한없이 외로워지게 하는 사람들을 도쿄에 남겨둔 채. 그렇게 혼자서 홋카이도로 떠났다. 그 중에서도 버스 한 대만한 길이의 지하철이 두세 시간에 한 번씩밖에 지나가지 않는 홋카이도의 동쪽 끝으로 가서, 사람 그림자도 찾기 힘든 마슈 호수와 아칸 호수, 오호츠크해, 지평선, 언덕, 절벽, 그런 것들만 찾아 다니면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다.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홀가분해서 미칠 것 같았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버스 안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그 기분을, 오롯이 다시 느껴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여름 휴가 때 홋카이도로 떠나기로 갑자기 결정한 것은,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때와 다를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다름을 조금은 기대하면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 책 『뉴욕』의 저자 김영주처럼, '처음'이 아닌 예전에 머물렀던 곳을 향해 '다시 한번' 떠난 여행에서, 쉽게도 권태로움에 빠져들었다.
 
 
2.
건물 밖으로 나오자 콜럼버스 서클의 벤치와 분수대 옆은 일요일 나들이를 나온 가족과 관광객들로 바글거린다. 날은 저물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난 뭘 해야 하지. 벌써 집에 가기에는 섭섭한 시간이다. 그러나 갈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혼자 무작정 걷는 것도 싫다. 일단 빈 의자를 찾아 두 바퀴쯤 돌던 나는 불현듯 찾아든 기묘한 낭패감에 놀라 이것이 외로움인지조차 깨달을 새가 없었다.
- p.285

혼자 하는 여행은, 특히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도시를 혼자 여행하는 일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이 없을 정도로 뜬금 없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던져주곤 한다. 그것은 다소 무례하게 엄습해 와서는, 나의 여행을 망가뜨리려 하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책의 저자가 말했듯, 나 역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은 이제 어느 정도 무뎌져서, 다시 한번 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 그 감정을 느꼈던 '그 때'를 떠올리며 그저 씁쓸해 할 수밖에 없음을.
 
 
3.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이어폰의 엉킨 줄을 끄르고 귀에 꽂을 때만 해도 음악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수백 번도 더 들었을 '피아노 맨'의 첫 음절, 하모니카와 피아노의 가뿐한 4분의 3박자 리듬이 들려오자 얼어붙었던 심장이 움쩍거렸다. 젊은 빌리 조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릴 때마다 잠잠하던 신경세포가 들썩거렸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술집에서 신나게 박자를 맞추며 흥얼거리던 아득한 지난날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소한 대상에도 미치고 화를 내고 기뻐 날뛰고 사랑하며 흥분했던 시간. 모든 것이 군색했지만 어설픈 열정으로 껴안았던 그때의 그리움이 송두리째 밀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그 감정들은 이제 무뎌지고 둥글넓적해진 세월의 항아리 안에서 적당히 버무려졌다. 나는 똑같이 그때로 돌아갈 수가 없다. 젊음의 특혜는 한번밖에 오지 않는다. 눈가가 서서히 후끈거리더니 드디어 가늘고 따뜻한 물방울 하나가 뺨 위로 흘러내렸다. 눈물이다. 안구건조증 환자처럼 눈물샘마저 말라버렸던 내게 단비가 내렸다. 각막이 촉촉해지고 가슴이 달아올랐다. (중략) 내가 뉴욕에서 만난, 20년 만에 이곳 구석구석에서 마주친 일상이다.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 그때는 차마 다가가지 못했던 평화다.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 p.166~167

비에이를 한바퀴 돌고 돌아와 지친 몸을 끌고 기차에 앉았을 때,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너머 언덕을 혼자서 걷고 또 걸으면서 너무나 신났었던 3년 전의 나는 없었다. 그저 호텔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비에이로부터 숙소가 있는 삿포로까지는 기차로만 2시간은 더 달려가야 하는 거리였고, 나는 피로가 조금이라도 풀릴까 하고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는 달디단 코코아를 마시면서, 아이팟에서 Mr.Children의  「I Love U」 앨범을 찾아 'and I love you'를 플레이 시켰다. 3년 전 여행의 막바지에 샀던 바로 그 음반이었다.
 
그리고, 'and I love you'에서 'CANDY'로 이어지는 그 트랙의 사이에서, 나는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그 감정들을, 그리고 그 때와는 달라진 또 다른 감정들을.
 
 
4.
여기까지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 휘휘한 곳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걸었다. 왁자지껄한 술집들을 지나고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을 스쳐 한적한 길가로 빠져나오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어설픈 과거의 향수가 드디어 내 발목을 놔준 것이다. 지금의 나이가 찬란해 보이고 새로운 열정이 신나게 요동을 쳤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마침내 나와의 화해가 끝났다. 내 볼 위로 밤바람이 살랑거리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어떤 행복도 지금의 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언젠가 뉴욕에 다시 와서 살아보는 거다.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면 어떤가. 그때 되면 이 도시가 또 다른 만찬들을 준비해 놓고 기꺼이 맞이해줄 텐데. 나는 목도리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여미고 소방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웨스트 빌리지 쪽으로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아직은 나의 집이 거기에 있다.
- p.418~419



가난했던 유학생 시절,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운동화 밑창이 닳도록 걷고 또 걸었던 나는, 바다로 떨어지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고 싶어 오타루 운하에서 왕복 5시간을 버스를 타고 달려 가느라 오르골당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나는 여행 기간 중 하루를 통째로 오타루에 있는 온갖 오르골 가게를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주위 사람들의 선물을 사면서 보냈다. 나쁘지 않았다.


3년만에 찾은 오타루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나는 꽤 많이 변해 있었다. 언젠가 '또 다시' 오타루에 가게 된다면, 이번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 이번 여행 중간중간 몇번이고 읽었던 이 책 『뉴욕』은 비록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읽게 되었지만, 여행가방에 꾸역꾸역 밀어넣었던 3권의 책 중 최고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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