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01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낯선 곳으로의 떠남을 꿈꾼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싶어질 때면 증세는 더 해진다. 2003년 7월, 당시 동아리 월간 웹진 업데이트도 후배 기자에게 떠맡긴 채 유럽으로 떠났다. 여행의 모토는 별 것 없었다. 그저 '낯선 거리를 걷고 또 걷고 싶다' 정도가 다였다. 그 수많은 낯설음 속에서의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질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별다른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 다행히도 처음 도착한 런던은 기대했던 대로 낯설었다. TV에서나 보던 빨간 지붕의 집들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펼쳐지고, 말로만 듣던 빅밴, 타워브릿지도 보인다. 사람들은 조금만 부딪혀도 양해를 구하는 매너를 보이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면 신호등이 빨간 불이어도 차들이 멈춰 선다. 지하철 안에서는 맞은 편에 앉은 연인들의 진한 스킨쉽에 표정 관리하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기차를 타면 창 밖으로 뮤직 비디오에서나 볼 수 있었던 끝 없는 지평선이 펼쳐졌고, 나라마다 건물 모양도 도로 모양도 달랐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길을 지도 하나 들고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물어가며 걷고 또 걸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뮌헨으로 가는 야간 열차에서는 불어로 적혀있는 안내문을 잘못 해석하고 비상 손잡이를 잡아당겨 무려 기차를 세우기도 했다. 모두 낯선 경험들이었다.
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던 외국인들도, 유럽의 거리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불어나 독어를 쓰는 나라에 가면 그나마 할 수 있는 영어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대화는 가능했다. 손짓 발짓 해가며 웃으면 누구나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려 애썼고, 다 같이 바디 랭귀지의 힘을 절감했다. 언젠가부터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일행들끼리 추측도 했다. "저 남자가 바람 피워서 여자한테 미안하다고 빌고 있는 것 같아", "쟤네들 보아하니 중학생 같은데 이 시간에 학교 땡땡이 치고 나왔나보네" 우리의 추측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들만 보고서도 우리는 소설을 몇 편이나 썼다.
유명한 관광지들도 화려하고 신기하지만은 않았다. 그 유명한 트레비 분수는 넓은 광장이 아닌 어느 시장 한 복판에 있어서 모르고 지나칠 뻔했고,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생각보다 작아서 멀리서 보고는 에펠탑일 리가 없다며 웃기도 했다. 템즈강과 센강의 밤은 낭만적이고 화려했지만 한강의 고요한 아름다움은 없었다. 베네치아는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서 보니 바닷물이 꽤 더러웠고, 에펠탑의 사이키 조명은 나이트 조명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화려하면 화려한 대로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를 느끼면 되는 것. 낯설음을 찾아서 떠났지만 유럽은 낯설지 않았다. 스위스의 어느 바닷가는 마치 정동진 같았고 뮌헨의 어느 거리는 우리 동네 같았다. 결국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고, 환경은 좀 다를지라도 그 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일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날 친구들과 선유도에 갔다. 유럽 가니 좋았냐는 질문에 "그냥 고생하다 왔지 뭐"라고 대답했다가 친구들에게 디스를 당해야 했지만, 선유도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홍세화씨가 센강을 바라보며 한강을 떠올렸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선유도는 센강 중간에 있는 시떼섬을 떠올리게 했다. 순간 눈 앞에 있는 한강과 유람선을 타고 보았던 센강이 겹쳐져 보였다. "센강보다 한강이 백 배 더 이쁘다!" 금방 친구들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한 달만에 보는 한강은 참 아름다웠다. 한강의 잔잔함이 일상이라면 센강의 화려함은 일탈이었다.
그리고 문득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일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밖에서, 또는 멀리서 바라보는 일상은 그 안에 있을 때와는 다른 색으로, 낯선 촉감으로 다가온다. 마치 숲 속에 있으면 나무만 볼 수 있고 숲은 볼 수 없듯이. 한국으로 돌아와 지독하게 익숙했던 일상의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평범한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곳으로 떠나도 그 곳 어딘가에 일상은 묻어난다. 그것은 그 낯선 곳을 느끼는 주체가 바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낯선 유럽 땅에서 나는 한국을 보았고, 언어도 외모도 다른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익숙함과 낯설음은 반의어가 아니었다. 익숙함에서 조금만 시선을 비껴 옆을 쳐다보면 낯설음이 있었고 그 낯설음 속에는 무수한 익숙함이 존재했다. 나에게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낯선 일상을 찾아내는, 또는 일상의 낯설음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브라이언 맥나잇의 Back at one을 들으면 브뤼셀로 향하는 유로스타 안에서 보았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윤상의 노래를 들으면 파리의 거리가 떠올릴 것이다. 일탈이 유혹적인 것은 결국 일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상이 없다면 일탈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돌아올 일상이 없다면 일탈이 과연 유혹적일까? 낯선 유럽에서 찾아낸 한국의 모습과 낯선 사람들에게서 찾아낸 나의 모습들이 아름다웠듯이, 일상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지루하고 짜증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은 그 자체로 참 아름다운 것임을 낯선 곳으로 떠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여행의 마지막날 파리 퐁피두센터 전시회에서 보았던 한 문구는 나를 다시 한국으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게 했다.
Most of the time nothing happens,
so I think it's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