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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cilk Jun 05. 2017

기억이 사는 집, 기억이 사는 시간

정수복, 『파리의 장소들』 그리고 꽃보다 청춘

2016.03.25



『파리를 생각한다』를 읽었을 때만 해도 파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희미했고 또한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당시 나는 배낭여행의 끄트머리에 겨우 3일간 머물렀던, 너무 좋아서 언젠가 꼭 다시 가리라 다짐했던 파리라는 도시로 온전히 혼자 떠나게 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 4년 반 후, 『파리의 장소들』을 읽었다. 그 사이 나는 2번 더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 2번의 여행에서 첫 배낭여행 때와는 달리 파리에서만 머물며 도시 곳곳을 많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조금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파리의 장소들』에 등장한 수많은 거리와 장소들 중 내가 걸어본 적이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책에는 유명 관광지들보다는 파리에서 수년간 살았던 저자가 살던 동네 주변 산책하기 좋은 길과 사람 구경하기 좋은 카페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니 당연한 결과다.



예전에는 파리에 대해 좋은 기억밖에 없었지만, 이제 파리의 좋지 않은 부분들도 알게 되었고 또 개인적으로도 파리를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파리에 대한 느낌도 많이 달라졌다. 어차피 동일한 장소에 대해서도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장소에 대한 기억이 다르고, 또 그 장소를 겪었던 시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정수복 선생의 '파리의 장소들'과 나의 '파리의 장소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정수복 선생은 '장소는 기억이 사는 집'이라고 했다.

기억이 사는 집이 장소라면 기억이 사는 시간은 음악이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이 흐르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음악을 좋아하던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하고 그저 그 음악이 어떤 지나간 기억의 분위기, 그 날의 공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리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기억의 장소에서 그 때 들었던 음악을 듣는 것이다.



꽃청춘 아프리카 편의 여행이 끝나는 순간에 흘러나온 음악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앨범 수록곡 '이제, 여기에서'. 앨범 전체가 여행에 관한 노래지만 2번 트랙의 이 곡은 누가 들어도 여행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 어울리는 노래여서, 꽃청춘의 아프리카 여행은 이렇게 끝나지만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라 좋았다.

내가 나영석의 꽃할배 꽃누나 꽃청춘 시리즈를 때로는 욕하고 재미없다고 까면서도 늘 챙겨보는 건 여행지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운 나영석의 선곡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예민한 누나들과 답답하기만 한 짐꾼 이승기 때문에 엄청 욕하며 봤던 꽃누나 시리즈도, 디오클레티안 궁전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스플리트의 풍경과 함께 정준일의 '새 겨울'이 흐르던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 겨울'을 들을 때마다 높은 곳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도시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낀다.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가보지 못했지만, 대신 피렌체의 두오모나 조토의 종탑, 베네치아의 대종루, 파리의 노트르담에 올라 너무나 기분 좋은 바람을 맞던 그때를 떠올린다. 그게 바로 여행과 음악이 만나는 순간의 힘이고, 나영석이 그걸 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의 여행 시리즈는 늘 기대할 수밖에 없다.


지루하고 고생스러운 시간이 대부분이라 해도 단 한 장면, 하나의 풍경, 하나의 음악만으로도 그 여행은 최고의 여행으로 기억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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