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꽃
어느 날 유일하게 발을 담그고 있는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SNS를 통해 떠도는 재미난 사진을 누가 소개한 것이려니 하고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누군가가 올린 말이나 글에 일일이 대꾸하기가 귀찮고 계속 침묵하기도 뭣해서 자연스레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라 그곳에서 주고받는 대화나 사진, 영상 등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며칠 후 습관적으로 단톡방을 기웃거리다가 그 사진을 보게 됐다. 사진의 주인이 말하기를 아파트 베란다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이런 모습으로 있더라며 놀랍고 신기하다고 했다. 사진 아래에는 느낌표나 이모티콘을 동반한 감탄의 말들이 이어져 있었다. 기형적인 모습의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무였다. 단톡방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방치한 무의 크고 작은 줄기에 이파리가 무성했다. 베란다 구석에서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한 탓인지 생김새가 제멋대로였다. 그렇긴 해도 그 당당한 생명력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는데 순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줄기의 끝에 열십자 모양으로 희끗희끗 피어 있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꽃 때문이었다.
무꽃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첫눈에 반했다오”였다. 생채나 깍두기를 담가 먹고, 각종 매운탕 요리에 들어가는 무에 꽃이 피다니? 무와 꽃의 조합이 생소하고 볼수록 신기했다. 책을 읽다가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되새김질하듯 나는 무꽃을 확대해서 골똘히 쳐다봤다. 이렇게 꽃을 피울 줄 아는 무를 그동안 칼로 난도질해서 고춧가루에 버무려 먹었단 말인가. 어떤 감동을 넘어서 묘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지나친 감상이라고 놀릴 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무가 강아지나 염소, 오리 같은 생명체로 여겨지면서 얼마 전 생채를 만들어 먹겠다고 무를 강판에 갈았던 나의 모습까지 되살아났다. 무, 강아지, 염소, 오리가 한데 엉켜 빨갛게 물드는 상상을 하면서도 그 대범한 자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왠지 무꽃이 낯설지 않았다. 이 기시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으로 기억의 상자를 헤집다가 마침내 밝혀냈다. 어디선가 살포시 손을 잡아본 듯한 그 온기의 실체를.
집 속에 집만 한 것이 들어있네/ 여러 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하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흐트러진 건 없는데 마음이 떨려/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네/ 무꽃/ 버리기가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 돋아난 꽃대궁/ 사랑을 나누었구나/ 스쳐 지나지 못한 한소끔의 공기가/ 너와 머물렀구나/ 빈 집 구석자리에 담겨/ 상처와 싸우는/ 무꽃
나는 아마도 함박눈이 내리거나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 날 펼쳐든 시집에서 무꽃을 봤을 테고, ‘마음이 떨려’ ‘사랑을 나누었구나’ ‘너와 머물렀구나’ 같은 끈끈한 시구들이 내 마음속에 어룽져 있었을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홀로 시간을 견딘 무의 주인에게 이 시를 보여주면 “맞아요, 무꽃을 보는 순간 딱 이런 느낌이었어요” 하면서 역시 시인의 감각은 다르다며 미소 짓지 않을까. 나는 낭독도 하면서 시를 여러 번 읽었다. 단톡방의 무 사진을 보며 내가 직접 그것을 발견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뒤끝이라 ‘누군가 놀다간 흔적’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시집을 덮고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상처와 싸우는’이 무슨 미련처럼 가슴 언저리에 맴돌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사랑을 나누고 상처와 싸우는 너를 만나봐야겠다고.
여자들의 등산일기
백화점의 식품관은 봄내음이 가득했다. 진열된 상품들의 푸르고 청정한 기운을 받아서일까, 노인도 청년도 아이들도 산뜻해 보였다. 자발적인 고립 속에서 겨울을 보냈던 나는 굼뜬 동작으로 둘레둘레 주변을 살폈다. 대낮에 백화점을 방문한 목적이 분명했으므로 주춤거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야채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싱싱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채소들이 열을 맞춰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단번에 무를 찾았다. 누군가의 알몸 같은 무, 하얗고 튼실했다. 저절로 손이 갔다. 땀이 촉촉하게 밴 듯한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제주도에서 출생한 무를 내 집으로 데려오는데 천 원짜리 두 장이면 충분했다. 무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지 싶어 투명한 유리그릇도 샀다. 제주산 무보다 두 배나 비쌌다.
내가 무를 ‘숙이’라고 불러주자 무는 나만의 숙이가 되어 주었다. 온기와 숨결을 간직한 다정한 숙이. 무의 윗부분을 잘라 유리그릇에 앉힌 후 물을 넣어 방 한쪽에 놓았더니 가볍지 않은 존재감이 느껴졌다. 내가 외로운 줄 어찌 알고 불쑥 나타난 친구처럼 말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뻐. 오래 머물다 가” “그래, 네가 원한다면” 이런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으로 숙이를 맞이했다. 숙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사흘쯤 지나서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후―, 하고 입김을 불어주면 꼬불꼬불 피어오를 것 같은 혈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는 숙이를 베란다로 데려가 봄빛과 봄바람을 충분히 쐬게 해주고, 유리그릇의 물을 수시로 갈아줬다. 내 울타리에 들였으니 제대로 키워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숙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춘분을 앞두고는 잎이 형태를 갖춰 제법 풍성해졌다. 그게 연초록의 브로치 같아서 내 모직 외투에 꽂고 싶었다. 봄비가 불러일으킨 충동에 이끌려 여수와 통영에 잠시 머물다 귀가한 날에는 몰라보게 자라 있어서 어리둥절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곧고 싱그럽게 몸집을 키우고 있는 기특한 성장 앞에서 나는 왠지 꿀리는 기분이 들었다.
숙이의 이파리는 질 좋은 원단처럼 짱짱했고, 성장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뭘 먹고 이렇게 크는 거야?”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숙이 때문에 내 방이 덩달아 푸르게 보였다. 옛날 노인들은 집 안에 무를 심어 키웠다고 한다. 무 이파리가 해로운 물질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무성히 자란 이파리가 집 안의 탁한 공기뿐만 아니라 내 머릿속의 먹구름까지 걷어내는 것 같았다. 숙이의 초록은 단연 돋보였다. 그 빛깔에 매료되니까 매사 초록색에 끌렸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도 숙이와 닮은 색깔에 눈길이 갔다. 그러다 손에 들어온 책이 <여자들의 등산일기>였다. 튼실하게 쭉쭉 뻗어 있는 나무들을 수채화 풍으로 드러낸 표지, 무엇보다 옅고 짙은 초록의 나뭇잎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는 기꺼이 소설가가 안내하는 숲속을 걸어보기로 했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제목 그대로 여자들이 등산하는 이야기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여자,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갈 곳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시설에서 근무하는 여자, 번역 수입으로는 자립을 못해 아버지의 양파 농사를 거드는 여자, 남편에게 이혼해 달라는 말을 들은 여자, 요양원에 드나들며 불륜 상대의 노모를 챙기는 여자가 산을 오르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소설에는 여덟 개의 산이 등장한다. 그 산을 여덟 명의 여자들이 오른다. 서로 전혀 모르거나, 자매 관계거나, 직장 동료인 여자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 앞에서 징징거리지 않고, 자연의 위로를 버팀목 삼아 다시 생활터전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순응하고 반성하면서 보다 더 씩씩해지는 여자들. 나는 일부러 책을 천천히 읽었다. 어떤 아픔을 간직한 여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기분으로, 힘이 들면 너럭바위에 앉아 초콜릿을 먹으며 호흡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내가 그녀들과 마음속으로 등산하는 동안 숙이의 몸은 부쩍 자랐다. 춘분이 지나 청명이 가까워 오자 신기하게도 꽃대궁을 밀어 올렸다. 연둣빛 쌀알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한 모습이 성숙한 여자가 되었다는 증표 같았다. 그것이 죄다 꽃이 된다면 얼마나 눈부실까. 상상만 해도 경이로웠다. 숙이와 살다보니 꽃집을 지나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닿았다. 사시사철 꽃이 핀다는 꽃기린을 집에 들였다. 물을 흠뻑 마시면 잎이 벌어진다는 녹비단도 데려왔다. 어울려 사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 선인장, 칼랑코에, 크루시아, 금천수, 벤쿠버제라늄이 우리 집 베란다에 자리를 잡았다. 제법 어른스러워진 숙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였다. 소설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여덟 개의 산을 모두 등반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숙이의 꽃대궁에 꽃이 폈다. 네잎클로버 모양의 연보라색 꽃이었다. 등산의 여운과 개화의 기쁨으로 마음이 그득했다. 무로 태어나 여기저기로 옮겨지면서 상처와 싸우다 끝내 꽃을 피운 숙이가 정말 어여뻤다. 숙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읽은 등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맑음을 나누어 받았네요”였다.
레몬향기를 맡고 싶소
봄날의 신부 같은 숙이를 지인들에게 보여줄까 하다가 말았다. 무슨 비밀처럼, 우렁각시가 우리 집에 살고 있는 것처럼 숙이를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숙이의 성장 과정을 찰칵찰칵 찍어 휴대전화의 갤러리에 저장해 두고서 꺼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숙이의 몸에 피어난 앙증맞은 꽃들을 소중히 다뤘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하는 마음으로 그 곁을 지날 때는 사뿐사뿐 걸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오히려 눈에 넣어 다니고 싶었다. 연보라색 꽃을 눈에 담으면 세상이 꼭 그만큼 예뻐 보이고, 꽃의 눈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왠지 둥글둥글하고 모가 없을 것 같았다. 숙이의 꽃들은 이내 시들지 않았다. 워낙 작아서 피는 순간 쪼그라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롱초롱했다. 나는 책상 위에 숙이를 올려놓고 틈틈이 눈여겨봤다. 베란다의 식물들을 바라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숙이를 애지중지하다보면 불현듯 나의 가족이 떠올랐다. 숙이한테는 자상하게 굴면서 피붙이를 소홀히 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 도시 저 도시에 흩어져 사는 가족에게 먼저 전화해서 안부를 챙기자 다들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5월에 접어들면서 숙이는 쇠약해졌다. 탄력적이었던 몸 여기저기에 거무스름한 점이 생기고, 줄기도 잎도 생기롭지 않았다. 내 방에서만 뜨는 별 같던 꽃잎도 서서히 오그라들었다. 하루하루 기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안타까웠다. 그건 단순한 잔병치레가 아니라 차츰차츰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숙이는 점점 볼품없어졌다. 사무용 가위로 누렇게 뜬 잎과 축축 늘어진 가지를 잘라줬더니 앙상하게 뼈만 남은 꼴이 됐다.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게 해주려고 햇살과 물과 바람을 자주 먹여줬다. 그럴 때마다 숙이와 비슷한 처지의 엄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해 전 머리를 다쳐 119 구급차에 실려 갔던 엄마는 퇴원 후 속수무책으로 늙어갔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영양제를 챙겨 먹는데도 어째 푸석푸석해 보이고, 검버섯이 깔린 얼굴은 칙칙한 낙엽 같으며, 구부정하게 느릿느릿 걷는 모습이 사나운 비바람을 간신히 견딘 오래된 가로수 같았다. 미관상 서둘러 뽑혀지거나 머지않아 폭풍의 후유증으로 자연사할 거리의 나무들.
숙이의 몸에서 뻗어 나온 줄기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꺾였다. 엄마는 산책로의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 무릎의 인대가 상했다. 숙이를 산뜻하고 젊게 만들어준 꽃들이 시들어 떨어졌다. 그즈음부터 엄마는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숙이에게 이상한 냄새가 풍겨 그 몸을 들여다보니, 물에 잠긴 부분이 물컹물컹 썩고 있었다. 유리그릇의 물을 갈아줘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물이 탁해졌다. 구린내도 났다. 외로이 고향집을 지키고 있는 엄마가 나랑 통화할 때면 기침을 해대며 가래를 칵칵 내뱉었다. 조만간 호흡기관을 망가뜨리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소리였다.
“왜 그렇게 가래를 뱉어? 약을 먹든지 병원에 가봐.”
“목구멍에 뭐가 잔뜩 낀 것처럼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내뱉게 돼. 밤에는 더하다. 입에서 군내도 나고.”
그 무렵 ‘죽음’에 초점을 맞춘 책을 많이 읽었다.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취향처럼 죽음을 앞세운 책들을 사들였다. 죽음을 배우거나,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고, 고독사한 사람들이 남긴 물건을 치우고, 임종을 앞둔 노모의 마지막 말들을 글로 옮긴 책들…… 죽음을 모르고는 이 세상에서 뭘 배워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죽음의 연장선상에 삶이 있고, 미리 죽음에 대비하면 인생이 살만해진다는 저자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으나, 나는 아직 죽음을 덤덤하고 의젓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레몬향기를 맡고 싶소>는 엄마와 숙이의 노후를 착잡한 기분으로 살피다가 만난 책이다.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소개한 글의 첫문장은 ‘1937년 “레몬향기를 맡고 싶다”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은 이상의 복잡한 내면 풍경을 읽을 수 있다’였다.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레몬향기를 맡고 싶다, 라니…… 순간 죽음이라는 구리거울에 투명한 빛깔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사는 몸이오’ ‘근심이 나를 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도회의 인심이란 어느 만큼이나 박해 가려는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다시 살아야겠어서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 나는 각 장의 제목을 반복해서 읽었다. 당신 없이는 못 살고, 이렇게 야위었고, 다시 살아야겠고……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요절한 천재의 질긴 고독과 정신적인 고열이 내게로 후끈 스며들었다. 생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려는 순간 몽롱한 의식 속으로 노랗게 떠올랐을 레몬, 그 상큼한 향기는 죽음이 떨어뜨린 씨앗이 아니었을까.
그해 봄바람을 타고 내게 왔던 숙이, 우리는 여름의 어귀에서 영영 이별했다. 진작 수명이 다했는데 어리석은 내가 숙이를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두 달 남짓 살다간 짧은 생이었으나 내가 느낀 체감의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이 길다. 바깥은 화사한 봄이었지만 혹독한 겨울 속에 갇혀 있던 나를 양지 바른 곳으로 끌어낸 것은 숙이의 탄생과 죽음, 그 끝자락에서 맡은 레몬향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