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은 지게차를 몰았다. 그가 ‘지게차’라고 말했을 때 J의 머릿속에는 옛날 농부들이 매고 다니던 지게만 떠올랐다. ‘지게’와 ‘차’가 합쳐지면 어떤 형태가 되는지 순간 의아했다. 휴대전화를 열어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세 글자를 입력했더니 ‘짐을 올리거나 내릴 때 사용하는 산업용 트럭의 특수한 형태’ 라는 설명과 함께 다양한 사진이 떠올랐다. J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속버스터미널 하차장이나 물류 창고, 또는 부둣가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알고 보니 지게차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운송수단이었다. J는 무작정 올라탄 고속버스 안에서 율을 처음 만났다. 이틀 후면 추석이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J는 고향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는 대신 여행 가방을 챙겼다. 그때마다 목적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대신 출발지는 고속버스터미널이어야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터미널에 도착하면 그곳이 어디든 바로 출발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맡겼다.
그해 가을 J와 율은 31번, 32번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추석이 코앞이라 고속도로가 포화상태였다. 서울을 떠난 지 세 시간 가까이 걸려 행담도 휴게소에 닿았다. 그곳도 매우 붐볐다. 운전기사가 이십 분의 휴식시간을 줬다. J는 그대로 앉아 있었고, 율은 차에서 내렸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컸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율이 “이거 드시죠” 하면서 음료수를 건넸다. 캔에 담긴 칠성사이다였다. 큰별과 작은별이 돋아난, 알로에 빛깔의 디자인을 보자 뻐근하던 눈이 개운해졌다. 칠성사이다의 꼭지를 열면서 31번과 32번은 말문을 텄다. 캄캄한 입안에서 별들이 톡톡 터지는 듯한 달콤 쌉싸름한 액체가 말을 만들어내는 신비한 액체 같았다.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입안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고속버스는 해남을 향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해남은 율의 고향, J에게는 낯선 도시였다. 그 상반된 감정이 묘한 기시감을 갖게 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다시 맺어진 인연은 해남 이후에도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J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솔솔 연기를 피웠다.
율은 해남공고 졸업 후 상경하여 침대 프레임을 제작하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다 입대했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가 제대하고 보니 세상이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그 속도감에 어리둥절했다. 최종 학력이 공고 졸업이라는 학벌에 주눅 들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일상의 변화무쌍한 풍경, 하물며 동년배 사이에서도 느껴지는 사고방식의 차이, 확연히 드러나는 생활수준, 무엇보다 높다란 취업의 벽…… 동질감이랄지 유대감보다는 이질감이나 위화감, 괴리감이 마음속에 자욱했지만 그렇다고 어영부영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게차 운전면허증을 땄다. 율은 알뜰하게 돈을 모아 지게차를 구입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일했다. 다행히 무거운 짐을 올리고 내리는 일은 심심찮게 이어졌다. 어디서든 연락이 오면 지게차를 몰고 출동하는 율. J는 칠성사이다를 홀짝홀짝 마시며 말로 보여주는 율의 ‘이력서’를 흥미롭게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칠성사이다의 냉기가 가시면서 톡톡 쏘는 맛이 없어졌지만 그만큼 단맛은 짙어졌다. 일종의 궁여지책으로 지게차를 선택한 것 같았으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율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어디든 달려가 기운차게 짐을 오르내리고, 어디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신만의 공간에서 핸들을 돌리는 남자. J는 율의 말투나 몸짓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을 제 마음에 이식시키고 싶었다.
사귄지 반년 쯤 지나서 J는 율의 별난 ‘놀이’를 알게 됐다. 그는 공항 나들이를 즐겼다. 몸과 마음이 시들해질 때면 율은 공항리무진을 탔다. 일거리가 많아서 끼니때를 놓치는 와중에도 우울과 무기력이 괴롭히면 일손을 놓고 공항으로 떠났다. 그렇지 않으면 꼭 사고가 난다고 했다. 한번은 활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부두에 갔다가 물귀신이 될 뻔했다. 선원의 옷자락이 지게차에 걸린 줄도 모르고 운전하다 그랬다. 율은 여행 인파로 북적거리는 공항에 도착하면 일단 화장실에 들어가 손부터 씻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행객이 길게 늘어선 항공사 부스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탑승게이트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일상에서 증발해버린 생기가 겨드랑이나 무릎에 조금씩 스며드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공항에 머물러 있는 시간만큼은 여행자인 것이다. 그렇게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다 어둠이 내리면 푸껫이나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기분으로 공항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율은 그렇게 활기를 보충하며 삶의 고삐를 바투 잡았다.
율은 J의 인생에 간이역 같은 남자였다. 지금 그 간이역은 사라졌다. 공항 나들이라는 흔적을 남겨둔 채. J는 그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갑갑증이 밀려들 때면 율이 그랬듯 공항으로 갔다. 탑승게이트에서 가까운 벤치에 앉아 그해 해남행 고속버스를 떠올리며 칠성사이다를 마셨다. 불친절한 삶을 견디는 그만의 방식이었던 공항 나들이가 이별한 여자에게 고스란히 전염됐다는 사실을 알면 율은 어떤 기분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