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 '바지를 벗다가'

- 벗고 벗어 마침내 모두 벗어도 남는 무엇

by 유용선

바지를 벗어놓으면 바지가 담고 있는 무릎의 모양

그건 바지가 기억하는 나일 거야

바지에겐 내 몸이 내장기관이었을 텐데


빨래건조대에 얌전히 매달려 있는

내 하반신 한 장


나는 괜찮지만

나 이외의 것들은 괜찮을까, 걱정하는 밤


내가 없으면 옷들은 걸어 다니지 못한다.




벗어 놓은 모자는 어느덧 내 두상을 닮아간다. 벗어 놓은 윗도리들은 내 상체의 모습과 그 습관을 반영한다. 벗어놓은 바지는 내 하반신의 모습과 그 습관을 반영한다. 벗어놓은 신발은 내 걸음걸이를 비롯해 경제력까지 반영한다. 내 의복은 나를 기억한다. 벗어 놓아도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인의 생각이 조금 더 발전한다. 바지 입장에선 인간인 내가 그의 내장기관이다. 단순히 사물과 인간을 바꾸어보는 활유법, 의인법이 아니다. 시가 수사학의 세계가 아니라 시인의 공감능력과 인식력이 빚는 발견의 세계임을 잘 보여주는 발상이다.

그런 생각의 순서를 밟아서 이제 내 집의 빨래건조대에는 의복을 넘어서 내 하반신이 된 바지가 걸려 있게 된다. 걷느라 앉느라 꿇느라 기느라 퍽 자주 움직였을 내 무릎을 제 기억에 담은 채 아주 얌전히.

3연으로 가서는 생각이 걱정 또는 연민으로 거듭 발전한다. 나는 지금 괜찮은데, 지낼 만한데 다른 것들은? 나 이외의 다른 것들은? 빨래는 대개 그렇듯이 아마도 늦은 시각에 했나 보다. 건조대에 얌전히 널린 바지를 보며 시 속의 ‘나’는 누군가 나 아닌 것들을 염려한다. 것들이라 했으니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니 사람을 제외한 것들이라 이해하면 안 된다. 이 시의 발상이 바지와 나의 하나 됨임을 잊지 말 것.

이제 결론으로 가 보자. 시의 마지막 연은 한 문장이다. 혼잣말처럼 툭 뱉은 한 문장. “내가 없으면 옷들은 걸어 다니지 못한다.” 바지에서 시작해서 옷으로 갔다. 부분에서 시작해서 전체로 갔다. 사람 또는 생명이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사람 또는 생명인 것에 대한 염려로 갔다. 그 모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을 때도 나 이외의 것을 걱정하는 내가. 그런 내가 없으면 내 시간의 모든 흔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유용선

독서학교 대표. 시 애호가. 글쓰기 코치.

시집 <다시, 잊는 연습 걷는 연습>,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웃으라 하시기에>

글쓰기 지침서 <글쓰기는 스포츠다>, <낙서부터 퇴고까지>

교양 <7일간의 독서여행>, <성경을 읽었습니다 - 구약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