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시 ‘세상 속으로’

사람살이, 사람으로 사는 일

by 유용선

나는 오랫동안 풀꽃의 생애를 노래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인사(人事)에 대해서 노래하련다

이제 내 몸이 바라는 곳, 눕고 싶은 곳은

산이 아니라 물이 아니라

병이 있고 근심이 있고 자주 흰 걸레를 더렵혀야 하는

마룻바닥이 있는 집

여름에는 퇴근길에 수박을 사고

월말에는 세금을 내러 은행에 가는 마을


이제 나는 이념에 물들지 않은 나무보다 이념을 구겨 호주머니에 넣을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선계(仙界)의 산정보다 아직 청소차가 오지 않은 골목들이 좋다

등을 켜고 다가오는 별을 보면

진흙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겨워진다

제도가 있고 공장이 있고 못 만날 약속이 있는

집 옆에 집, 아, 사람이 살고 있다




꽃을 노래하고 숲과 강과 바다를 노래하고 가끔은 그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노래하며 살면 시인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삶이겠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인식 곧 분별과 판단 없이는 시를 써낼 수 없는데 말이다.

천생 선비풍인 이기철 시인은 도시가 지닌 파괴적인 속성을 벗어나 태초의 순수한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시에 즐겨 담았다. 오늘 소개한 시는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는 초목과 동물의 평화로운 모습이 담뿍 담겨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집에서 다음 시집의 방향을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 어떻게 살아야 초목처럼 동물처럼 대자연의 순수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는.

시인이 가장 먼저 수긍한 것은 질병과 근심이다. 초목과 동물이라고 질병과 근심이 없을까. 이어 시인은 일상으로 눈을 돌린다. 고양이가 제 털을 부지런히 핥아 정돈하듯이 사람도 제 입는 옷가지와 제 사는 공간을 자주 닦아야 한다. 하지만 끝끝내 도시와는 친화하지 못한다. 비좁은 베란다보다는 마당과 거실을 잇는 마룻바닥이 있는 집. 식구들과 함께하는 단란한 저녁. 국가 구성원으로서 의무인 세금납부.

인간의 이념에 대해서도 자못 관대해졌다. 하지만 시인이 긍정하는 이념이란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 칼집 속에서 날카롭게 날이 세웠거나 총기 속에서 뾰족하게 끝을 겨누는 것이 아니다. 종이처럼 구겨 호주머니에 넣고 그 파괴적인 속성을 보류할 줄 아닌 그런 이념이다.

“신선이나 부처, 성인은 고사하고 어지간한 사람 되기도 힘들어.”

나는 일상에서도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리다가 종교인들로부터 빈축을 사곤 한다. 하지만 내가 옳지 않은가? 신선이나 부처 같은 닿지 못할 이상형을 세우는 것보다는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는 수양법으로 일신우일신하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어둠을 힘겹게 밝히는 별빛 몇 개만으로도 길을 잃은 나그네는 길을 찾는다고 한다. 질서와 억압 사이에서, 근로와 착취 사이에서, 신뢰와 배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이웃, 아, 옆집에 이웃이 산다. 그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람으로 사는 일이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이기철시집.jpg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용선

시 애호가. 독서학교 대표. 글쓰기 코치.

시집 <다시, 잊는 연습 걷는 연습>,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웃으라 하시기에>

글쓰기 지침서 <글쓰기는 스포츠다>, <낙서부터 퇴고까지>

교양 <7일간의 독서여행>, <성경을 읽었습니다 - 구약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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