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쫓겨난 사람

by 유용선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대한 성자를 쫓아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은 고대 형이상학의 심연에서 솟아나왔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형이상학자들은 인간을 신의 조각으로 취급하고자 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 호칭은 왠지 세속을 멀리 떠나 저 높은 곳에 있는 존재에게나 어울릴 이름 같다.

하지만 본래 메시아니 그리스도니 하느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은 유대인에게는 일상에서 흔히 쓰이던 표현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아는 그들 공동체의 희망을 짊어진 이에게 부여된 사회적 상징이었다. 그러니 메시아를 굳이 신격화하지 않아도 그 빛은 흐려지지는 않는다. 민중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자 맨몸으로 번뇌의 불길을 건넌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 모습이 우주에서 직접 강림한 신적 존재보다 뭐가 부족할까.

사람들은 범상해 보이는 진리보다 장엄한 신화를 원한다. 멀리 있을수록 강력해 보이는 존재, 이해할 수 없을수록 위대해 보이는 존재. 위대한 성자들은 그렇게 자의와 상관없이 신성을 입곤 한다. 그 이야기와 논리를 담은 경전에 제도를 얹히고 의식이 더해지고 권력이 붙는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경전은 시요 소설이요 전기문이요 보고서요 에세이다. 그 속에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가 풍성하다. 그러나 독자가 그 문학성을 외면하고 경전을 법령처럼 받아들일 때 그 텍스트는 삶을 구원하는 노랫말이 아니라 사고를 마비시키는 중독성 물질이 된다. 문자 뒤에 숨은 맥락을 보지 못하면, 언어란 폐쇄적 신념이 되고, 그러한 신념은 때로 사람을 병들게 할 뿐이다.

위대한 인물을 신격화하는 방식은 종교의 기득권이 가장 안락하게 유지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신의 의지를 전달하고 해석할 권한을 성직자가 독점하고, 구원은 지극히 세속적인 교단의 관리 아래 놓인다. 그런 수순을 밟아 종교는 권력의 장이 된다.

어째서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 놔두지 않을까. 어째서 우리는 그에게서 피를 빼앗으려 할까. 어째서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같은 땅을 걸었던 그의 발이 다시는 지상을 밟을 수 없게 하는 걸까.

굳이 신격화하지 않아도 인간인 그야말로 진정한 신비이다. 그가 흘린 땀과 눈물, 그가 남긴 침묵과 질문, 그가 보여준 삶과 죽음. 신들의 세계에서 그를 데려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기념한 경전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신의 이름으로 쫓아낸 그를 다시 불러내 그 앞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를 거둬낼 때, 비로소 그가 우리 안에 존재했던 시간이 신성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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