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 ‘ㅇ(이응)’

- 가까이 모나고 멀리 둥근 이 세상

by 유용선

ㅇ 하면

은빛으로 구르는

굴렁쇠 소리

ㅇ 하고

꽃잎에

이슬로 맺히리


다시

이슬에게 ㅇ 하면

입 맞추고 떨어지는 입술

꽃잎을 보리

꽃잎 진 그 자리에

ㅇ이 맺혔으리

꼭지를 달고


주렁 주렁 주렁

모든 열매는 다

모두 다 ㅇ이리

ㅇㅇㅇ을

여러 번 소리 내면

너나 나나 모두가

ㅇ이 될 터




서정춘 선생의 두 번째 시집 '봄·파르티잔'에 수록된 작품이지만, 확인해 본 바 첫 시집 <죽편>에 수록된 시편들과 같은 시기에 쓰인 것이라 한다. <죽편> 수록 작품들은 짧고 함축적이고 정제된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지금 소개하는 작품 ‘ㅇ(이응)’도 너무 길어서 편집의도와 맞지 않았다고 하니, 정제된 시편의 진수를 맛보고자 하는 이는 꼭 읽어보시길.

자음 없이 곧바로 모음으로 시작하는 음절의 첫 활자로 쓰일 때의 ㅇ은 묵음이고, 모음을 닫는 자음으로 쓰일 때의 받침 ㅇ은 울림이 둥근 소리이다. 모음이면서 동시에 자음인 글자. 비어있을 때에는 모음이면서 든든하게 떠받칠 때는 자음인 글자. 이 두 ㅇ의 느낌을 차분히 밟아가다 끝에 가서 ㅇ이 지닌 둥근 성질을 인간관계로까지 확장했다.

ㅇ은 굴러가는 소리이며 맺히는 소리이며 맺혔다 떨어지는 소리이며 떨어졌다 맺히는 소리이다. 하여 세상의 모든 열매는 ㅇ인데, 그렇게 주렁 주렁 주렁 열매 맺은 이응을 여러 차례 소리 내면서 나도 당신도 그 둥근 모습 속에 한 데 어우러지자는 참으로 둥글기 그지없는 노래이다.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둥근 느낌이 충만하지만 사실은 속속들이 모난 이미지가 갈무리되어 있다. 굴렁쇠 이전에 은빛 직선이 있고, 이슬 이전에 꽃잎의 펼침이 있고, 벌어진 둥근 입술 이전에 입맞춤의 마주침이 있으며 열매 이전에 꼭지의 뾰족함이 있다. 둥근 열매가 맺기 전의 다양한 ‘모남’을 솜씨 있게 갈무리하였기에 ㅇ이 모양으로나 소리로나 더욱 빛나고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그제야 비로소 “당신도 나도 ㅇ이 되자” 하고 외친다.

삶이 다 그렇지 않은가. 가까이 겪었을 때는 모난 것투성이나 멀리 떼어놓고 보면 둥글고, 나이 어려서 겪었을 때는 따끔하였던 것도 시간이 지나서 접하면 내가 고작 저 정도로 그리 아파했구나 싶다.

만약 <모음>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도 이 ㅇ의 매력에 흠뻑 빠졌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서정춘시집2.jpg <봄, 파르티잔>



※ 시단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선생님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셨고 순천 매산고등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시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셨죠. 그런데 등단 후 28년만에야 첫시집이 나왔습니다. <竹篇>(1996)이 바로 그 시집이죠. 화제작이란 말로는 모자라고, 20세기말에 한국문단이 거둔 최상품 수확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밖의 시집으로는 <봄, 파르티잔>과 <귀>가 있습니다. 파벌이나 인맥 따위랑 멀리 떨어져 청청하신 분으로 고매하면서도 한편 수수하시어 여럿으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죠.

서정춘.jpg


매거진의 이전글이응준 시 '꽃과 공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