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나의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 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너 나 없이 쓸 만한 경력을 쌓으려 고군분투하는 시절이다. 학력은 기본이고 자격증도 기본이며 경력마저 기본이다. 외모는 덤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젠 그마저도 기본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듯싶다. 그래서인지 찰칵, 하고 흰 빛을 뿌리며 목과 얼굴을 거둬가는 증명사진을 빛의 칼날이 내려쳐 흰 피를 뿌리는 목 자르기로 이미지화한 이 시가 더욱 인상적으로 와 닿는다.
풍향계는 화살모양의 추에다 날개를 두 장 달아 놓고, 추와 날개의 무게 중심에 기둥을 받친 모양이다. 약한 바람에도 잘 움직이며 화살 같은 추의 끝은 언제나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가리킨다. 저곳이에요. 바로 저곳이에요. 흔들리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리는 기계.
시인은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붙일 사진을 찍으러 미소를 만드는 순간 풍향계를 본다. 이력서가 진학을 위한 것인지 취직을 위한 것인지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어느 것이든 나를 향해 불어오는 세상의 바람이기는 마찬가지니까. 그 앞에서 나는 나를 증명해야 하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부위를 지목해야 하니까.
내일을 증명하려는 나의 젊은 가슴은 풍향계처럼 요동친다. 흰 피를 뿌리며 잘려나간 내 얼굴들 가운데 돌려받지 못하고 끝내 버려질 것이 더 많겠지만 나는 기어이 넉넉히 증명사진을 찍는다. 추운 얼굴에 밀랍처럼 창백했던 미소는 어느덧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웃음으로 바뀐다. 소속되기 전에 수십 번 잘려나가는 목이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목.
유용선
독서학교(T.02-338-4338) 대표. 시 애호가. 글쓰기 코치.
시집 <다시, 잊는 연습 걷는 연습>,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웃으라 하시기에>
글쓰기 지침서 <글쓰기는 스포츠다>, <낙서부터 퇴고까지>
교양 <7일간의 독서여행>, <성경을 읽었습니다 - 구약성서>, <맞춤법이 잘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