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선 적음
열일곱 살에 어린 왕자에 빠졌다. 빠져도 아주 단단히 빠져버렸다. 그때 다시 만난 어린 왕자에게 시 형식으로 편지를 쓰면서 시에도 빠져들었다. 이 책을 원서로 읽어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대학교 전공도 프랑스어를 선택했다. 역서가 워낙 많아 번역에 가담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가 2004년 여름부터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몇 가지 가슴 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간 당시 작가의 처지와 시대상황 탓에 원서 자체가 불완전했다. 가장 유명하다는 영어 번역본은 중요한 구문을 누락했고 중요한 낱말을 잘못 번역했다. 어린 왕자는 일자리도 구하고 견문도 넓히려고 이웃 별들을 방문하기로 한 것인데, 그 역서는 ‘견문을 넓히려고’만 번역해 놓았다. 4장에선 친구가 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역본들도 확인해 보니, 빠뜨린 문장이 전혀 없는 한국어 번역서는 숫제 없었다. 원본에도 문제가 있다. 에필로그가 27장에 함께 묶여 있다.
사실 어린 왕자는 어린이가 아니라 청소년 또는 청년이다. Le prince는 공주의 상대어인 왕자로도 쓰이고 작은 나라를 점유한 임금에게도 쓰이는데, 이 책에서는 후자로 쓰였다. 그는 장미와의 사랑에 실패한 뒤 직업과 정체성을 탐색하고자 세상을 방랑하며 어른이 될 준비를 한다. 어른이 되길 거부한 피터 팬과 달리 어린 왕자는 이상적인 어른의 상을 찾아 헤맨다. 내가 사랑을 알아가고 삶의 진로를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열일곱 살에 비로소 어린 왕자에 빠져든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번역에 착수하자 조급한 심정이 들었다. 내 오랜 친구의 정신연령부터 다시 설정하고 문체도 총체적으로 바꿨다. 하지만 그럼에도 번역본 초고 상태는 바오밥 나무 세 그루로 폭발 직전이 되어버린 어떤 이의 별 같았다. 외국어를 모국어로 바꿔나갈 때 생겨나는 희한한 현상. 수없이 뇌까렸다. “이게 내가 쓴 글이라고?” 이런 저런 사정에 밀려 짬짬이 원고를 들여다보며 만지작거리는 세월을 보내다 이제야 꺼내놓게 되었다.
지구에는 아직도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이가 아주 많다. 그들과 나는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이 사랑스러운 친구를 사이에 두고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어린이와 청소년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힘써(!) 어린이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든 어른’에게 바친다.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 가운데에는 아직 어린이를 잃지 않은 어른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 열일곱 살 적의 유용선으로부터
온갖 빛깔 고운 찬사들이
제 의미를 잃고
소박한 탄성만이 잘 어울리는
그를 만난 그날
모자로밖에 보이지 않던
종이구렁이 속에 코끼리 있음을 본 후로 나는
원숭이를 닮은 사람 사람 속마다
자그만 우주 들어있음을 볼 수 있었다.
기름진 땅 위에 다툼이 일고
황량한 사막이 차라리 평화로울 때
사막을 방문한 어린 왕자
“친구를 찾아요!”
불행하다,
어린이를 잃은 어른들
“양이 장미를 먹어요!”
그가 겁에 질리어 소리칠 때에
웃고들 있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도 그럴밖에
소, 돼지가 사람을 먹고
눈 먼 발길질에 청춘이 절룩거려도
나 몰라라 하는 이들
왕들은
모태에서 대관식을 한 듯
혼자 잘난 체하고
부자는
하늘의 재물을 따 모은 양
땅에 인색하고
대열을 벗어난 낙오자들은
삶이 나누어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술로 환상으로 숨으려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바보짓을 도리어 자랑하거나
고운 일을 곱다 여길 줄 모르며
헛되이 뜬 구름 시간을 흘린다.
외로운 연인, 나의 아름다운 왕자.
황혼아, 너 다시금
하루 마흔 번 널 찾는 그를 보거들랑
잊지 말고 내게 알리라.
바람아, 너 날다가 혹시
그의 집 앞을 지나게 되거들랑
잊지 말고 내 그리움을 전해라
잠들어 있거든 깨우지는 말고
사막에서 속삭이던 그의 작은 음성은
들로 산으로 문명으로 울리어
내 작은 우주에도 - 혼돈상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다다랐다.
"별들이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샘이 숨어있기 때문이죠."
이제 인간의 대지 위에
밤이 깊고
무심히 땅을 내려다보는 별들은
슬기처럼 밝고
꽃인 양 어여쁜데
왕자,
비록 그 사막에 더 이상 너 없어도
언제나 너의 기억은
바랠 수 없는 순수로
너를 아는 모든 이와 함께
내 곁에 있다.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