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목소리
“보라, 내가 이제 특사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리라.”(말라기 3:1, 23)
예수보다 먼저 군중의 주목과 지지를 받은 사람은 요한입니다. 지방의 사제 가문 출신인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15년부터 활동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리 지방의 영주로,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각각 재임하던 때입니다. 광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낙타털옷 차림에 가죽허리띠를 맸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평소 가죽허리띠 차림이었고 아합과 이사벨의 군대를 피해 광야로 피신했던 엘리야가 연상됩니다.(열하 1장 6절, 19장 4절 참조)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구약성서의 기록은 엘리야가 돌아올 거라는 전승이 되어 있었습니다.(열하 2장. 집회 48장 9, 10절) 요한은 마치 돌아오기로 한 엘리야처럼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죄를 용서받으려는 자는 성전에 양, 염소, 비둘기 따위를 바쳐야 했습니다.(레위 4, 5장) 그렇다고 물세례가 요한이 창조한 방식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사제 직분은 로마 피식민 상태에서 계급의 양극화를 이루었습니다. 도시의 성전을 관리하는 사제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부패를 일삼았고, 촌락의 사제들은 민중의 편에 선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친은 유다 산악지방 작은 촌락의 사제였습니다. 다윗의 신하 사독의 후손으로 이어지던 대제사장직도 왕이나 로마총독이 임명한 자가 역임함으로써 혈통의 정통성도 깨진 지 오래였습니다. 피식민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은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고 그리스어의 일종인 아람어를 사용했으므로 성서 내용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사제들의 권위에 굴복했을지라도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암살단으로 활동하는 젤롯(열성당원)도 있었습니다. 일부 사제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종교의식을 만들어 행하기도 했는데, 물세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물이 갈라져 뭍이 드러났다는 창세기의 묘사라든지 노아의 방주 전승이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당시 물세례는 온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였습니다. 엘리트 계층에게 무시당하던 암 하아레츠(Am-Haaretz)는 요한을 따랐습니다.
* 암 하아레츠(Am-Haaretz): 히브리어로 ‘어느 지역의 백성’이란 뜻으로 쓰이던 말이었으나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랍비들이 종교적 제의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켜 부도덕하고 불경건하고 율법을 잘 모른다고 경멸하며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절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율법에 적힌 대로 성전에 제물을 바칠 여건이 못 되었습니다. 제사용 제물을 키우는 업체들도 성전사제들의 공인 아래 몇몇 가문이 독점했습니다. 체제의 모순 탓에 나날이 점점 더 가난해지는 데다 종교적인 이유로 죄인 취급까지 당하며 죄의식에 짓눌린 채 살아가던 사람들이 요한을 따른 건 당연했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모두 맞섰습니다. 그는 영주, 최고 사제, 부자, 군인 등 사회 지배계급을 향해 정의와 자선과 공평을 외쳤습니다. 민중은 그를 존경해 어쩌면 그가 자신들이 기다리던 민족의 구원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세부적인 권고는 상대에 따라 다르게 했습니다. 군중에게는 경제적인 나눔을, 세금 걷는 이에게는 정직과 공정을, 군인들에게는 폭력과 비리를 범하지 말라고 각각 권고했죠.(루가 3:7~14) 그는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답게 금주, 단식 등 금욕적인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그의 행동을 따라했습니다. 요한의 이러한 철저한 금욕 실천은 그와 군중 사이에 거리감으로 작용했을 듯싶습니다. 존경하지만 똑같이 따라할 수는 없는 존재.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일제히 증언합니다. 예수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가 자기보다 큰 인물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공생활 이전 모습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귀족도 아니고 사제도 아닌 예수는 요한과 같은 재야의 사제들과 학자들로부터 일찌감치 율법과 예언서를 배웠을 겁니다. 루가복음(2:41-52)에는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 회당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 운동을 요한 운동과 떼어놓고 설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