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신이 잘하는 걸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신혼 때 남편에게 한 말이다.
빨래를 개는 손놀림이 범상치 않았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수건을 단번에 '탁' 내려치더니 정확히 세 번을 접었다. 티셔츠는 또 어떤가. 마치 셔츠가 반듯이 누워 잠을 자는 듯 보였다. 밖에서는 누구에게도 각 한번 세울 줄 모르는 남편이, 빨래 개는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심 봤다!'를 외치고 싶었다. 감탄했다는 듯 박수를 '짝짝짝' 쳐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이후로 나는 빨래를 개지 않는다. 남편은 제대로 낚였다. 지금도 건조기가 할 일 다했다고 콧노래를 부르면 잽싸게 달려가 저지레하듯 바닥에 펼쳐놓는다. 남편이 '끙' 소리를 내며 앉는 소리가 들리면, 나른했던 일요일 오후가 돌아눕는 시간이다.
그 뒤로도 본인도 모르는 재능을 더 찾아주려고 유심히 살폈다.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눈치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더는 없었다. 재능까지는 아니었지만, 남편은 청소도 곧잘 했다. 기준은 명확하다. 나보다 잘하면 잘하는 거다. 그런 남편도 꺼리는 장소가 있다. 딸의 방이다. 안보는 게 상책이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방문이 활짝 열려있을 때는 우리는 눈을 감고 그 앞을 후다닥 지나간다. 치워줄 엄두도 내지 못한다. 다섯 살 무렵부터 시작한 저지레는 색종이로 시작해 클레이, 나뭇조각, 천 조각, 레진, 물감, 아크릴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숨이 턱턱 막혀 잠도 오지 않던 한 여름이었다. 밤마다 마실을 나가던 딸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다. 돌아와서는 몇 시간이고 꿈적하지 않고 방 안에 있을 때, 창가를 기웃거리는 달님처럼 방문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소리가 나든 문을 벌컥 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저지레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이는 그렇게 자라서, 프로 '저질러'의 길을 걷고 있다. 대학 졸업 작품 전시회에서 보았다. 우리 동네가 벽면에 걸려 있었다. 밤마실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나의 마을이 작품 속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손톱만 한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 작은 구멍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어질러진 책상 위에, 깨알 같은 일상이 놓여 있었고, 성냥개비 같은 테라스 난간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빨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딸의 꿈이 펄럭이는 것처럼.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나의 저지레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오감을 통해 순서 없이 밀려 들어온 것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손에 닿을 듯 말 듯 둥둥 떠다닌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끙' 소리를 내고 책상에 앉았다. 손가락 끝이 달달 떨리며 하나의 자판만 두드리고 있다. 살면서 정리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이 케케묵은 빨랫감처럼 쌓여있다. 이것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다. 구겨진 수건을 펴듯, 마음의 주름도 '탁탁' 자판을 두드리며 각을 잡아볼 시간이다.
깜깜하기만 한 머릿속으로 밤마실이라도 나가볼까 싶다. 어지러운 골목을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가 나만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마을 하나가 휘영청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