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증거

새겨야 할 상처

by 펜끝

그런 상처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의 몸을 도화지 삼아, 예리한 칼날을 붓 삼아 그어댄 흔적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흉터가, 이유조차 모를 무늬로 열여섯 살 어린 몸에 새겨졌다.


외면했던 일이다. 아는 게 두려웠던 일이다. 그분을 보며 ‘상처’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날의 흉터가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위안부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용수' 할머니의 이야기다. 방송을 보다가도 끝까지 본 적이 없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고개를 돌려버린 나 같은 이들이 그분을 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이번엔 달랐다. 알아야 했다. 증거로 남기신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기억해달라는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일이라고, 추잡스러운 일이라고 가족조차도 외면했던 삶. 그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전쟁의 한복판, 변소 칸보다 못한 곳에 내몰린 소녀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들은 것을 글로 옮기는 데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늘 이런 식으로 쓰다 말았다. '뭣 하러'. '굳이'. 할머니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는 건, 이런 종잇장처럼 얄팍하고 나약한 마음들 때문인지 모른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야 할 때, 할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건 치부가 아니다. 가려야 할 일도 아니다.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그분은 하나의 증거가 되어 단상에 올랐다.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제 발로 갔다고 조롱하는 악랄함 앞에서 할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그 모든 고통을 지고 살아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날을 다시 꺼내셨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이제서야 마주할 용기를 냈다. 분노를 삼키며 벌게진 눈시울을 애써 부릅뜨고 마주했다. 좀처럼 몰입하기 힘들었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도 못했다.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거리, 홀로 앉아 있는 소녀상을 보았다. 누군가 걸어 놓은 빨간 목도리가 눈이 시리게 파고든다. 그것밖에 해줄 수 없는 마음을 따라 내려가다, 소녀의 맨발에 시선이 멎었다. 신어본 적 없는 가죽구두를 주겠다는 꾀임에 따라나섰던 소녀는 맨발로 돌아왔다. 아무도 품어주지 않는 나라, 숨기기에 바빴던 가족에게 할머니는 없는 사람이었다.


속이 울컥거려 뭔가를 토해내고 싶었다. 악에 받쳐 손톱을 세우고 가슴팍을 긁었다. '내가 뭐라고. 여태껏 모른 척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지 묻고 싶었다. ‘너, 왜 갑자기 심장이 나대는 건데? 이제 와서 왜 남의 상처가 내 상처인 양 느끼는 건데?’ 혼잣말하는 내가 들렸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건, 양심이란 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말이야.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막다른 골목에서 편견으로 똘똘 뭉친 오만한 나를 봤거든.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보이기 시작했어.'


외면했다기보다 두려움이 먼저였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건 가당치 않은 일이다. 아픔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이 거듭될수록 마음은 점점 돌덩이를 달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 느껴졌다. 겁쟁이처럼 마음을 숨기기 바빴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쓰기 시작했다. 오랜 두려움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감정을 껄끄럽게 할지라도 적어 내려가야 했다. 상처에 다가갈수록,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건 상처가 아니라 기억해야 할 증거였다. 상처받았다고, 주었다고 말하기 전에 그 상처가 하려는 말을 들어야 한다.


지워버리려고도, 덮으려고도 하지 말고, 기억해야 증거로 새겨야 한다는 걸 반백이 되어서야 깨달은 내가 손톱 밑의 가시처럼 아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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