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행 중 만난 친절함과 상냥함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함이 필요한 요즘이었다. 내가 지닌 인류애와 자기애가 무례한 사람들과 상황들로 인해 조금씩 훼손되어 갔고, 나 자신의 따뜻함과 정정당당함도 함께 고갈되기 시작했다. 세상에선 종종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났다. 주말 내내 이불 속에 웅크린 채로 마음을 건드릴 만한 영화들을 보고, 유튜브에서 귀여운 동물을 찾아보고, 깜찍한 친구들과 얼마 간의 대화를 나누었지만 다정함을 '완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문득 임시저장해두었던 이 사진들이 떠올랐다. 지난 프랑스 여행에서 나에게 난데없이 찾아온 친절함을 묶어둔 것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다 불친절하다고? 그렇진 않을걸요?' 프랑스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말을 건넬 요량으로 보관해 두었던 조각들이었지만, 오늘의 나를 다독이는 용으로 글의 목적을 바꿔보려 한다. 예기치 않은 데서 불쾌감이 날 할퀸 것처럼 다정함 또한 내게 불쑥 날아든 날이 있었다.
파리 시내에 도착한 때는 저녁이었다. 녹초가 된 채 다다를 게 뻔했기 때문에, 첫 며칠의 숙소는 공항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곳에 있는 부띠끄 호텔로 정해 두었었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출국 전날까지 새벽 시사와 녹화를 진행하느라 밤을 꼬박 샌 채 출발해야 했고, 평소보다 더 길어진 비행 시간으로 인해 꽤나 피로해진 채로 숙소에 도착하였다. 대충 짐을 푼 뒤, 뜨거운 물을 받은 욕조에 노곤하게 몸을 뉘었다가 푹 잠들었다.
아, 그런데 너무 푹- 잠들고 말았다. 개운하게 눈을 떠 보니 아침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호텔조식 성애자'로서 미리 신청해두었던 조식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미 시간이 지났지만 슬쩍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전날밤 셀프 체크인할 때는 뵙지 못했던 사장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잘 잤어요? 네, 어젯밤에 도착해서 아주 잘 잤어요. 잘 잤다니 다행이에요. 아, 그런데 아침 식사를 신청했었죠? 네 안 그래도 여쭤보려 했는데. 조식은 끝난 거...죠? 그렇긴 한데, 뭐라도 좀 챙겨 줄게요. 가만 있어봐...
식사 준비 담당자가 이미 퇴근해서 너무 별 게 없다고 사장님은 머쓱해 하셨지만, 에스프레소까지 내려 내어주신 차림은 기대보다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상큼한 과일, 잼을 곁들인 요거트, 간단한 빵과 커피, 그리고 간간이 곁들여 주는 상냥한 말들 덕분에 조식 시간을 한참 넘기고서도 건강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음날은 무사히 제시간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었다. 치즈&햄 플레이트, 바게트와 주스 등을 제외하곤 첫날 얼추 다 챙겨주셨던 셈. 꽤 신경써서 준비해 주었던 마음을 느끼곤 기분 좋게 여행을 시작하였다.
숙소에서 나와 Jeu de Paume 전시를 보러 가는 길에 가보고 싶던 카페가 있었다. 예쁘고 작은 카페는 역시나 인기가 많은 곳인지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감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나중을 기약하긴 어려웠던 터라, "혹시 앉을 수 있는 다른 테이블은 없겠죠?"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사장님이 "자리 진행시켜!""당장 자리 만들어 줄게요!"라고 외치며,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직원들에게 곧장 이것저것 지시를 하였다. '이 테이블은 좌석이 아닙니다'라는 메모가 놓인, 꽃병으로 꾸며진 예쁜 장식용 테이블에서 메모를 치우고 꽃을 정돈하여 금방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좋은 자리로 옮겨준 것도 카푸치노와 바나나 브레드의 맛만큼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다.
밴드 카사비안의 라이브 공연을 보았던 밤. 공연 전 FNAC에서 티켓을 발권할 때, 결제했던 카드를 놓고 온 나를 위해 융통성을 발휘해 준 직원 덕분에 콘서트 시작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공연이 끝난 후 찾은 작은 펍에서도 뜻밖에 다정한 시간이 이어졌다. 와인 한 잔 마시며 공연의 여흥을 누리려 근처의 펍을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공연 관계자들의 아지트였던 것. 서로가 속한 방송업과 음악 산업에 대해 흥미로운 질답을 나누었고, 어쩌다 보니 일에 관한 고민들도 터놓게 되었다. "너는 분명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을 거야!", "너 정도면 여기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어!" 본지 몇 시간이 채 안 된 이들이 무턱대고 던지는 응원이 어찌나 고맙던지. 언젠가 이도저도 안 풀릴 때, 좀 더 넓은 세계를 나의 선택지로 두어도 괜찮겠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와인 한 잔과 다정한 격려, 11월의 피닉스 공연 초대장ㅡ못 가서 너무 아쉽지만!ㅡ까지 건네받아 공연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파리에 살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 S를 만나는 것은 이 여행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도 종종 봤던 그의 프랑스인 연인 F와 셋이 함께 한 식사는 매번 즐거웠다. 어딘가 어설프고 긴장되었던 '한국에서의 F'와 달리, 일명 자신의 '나와바리'에서 너무나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프랑스의 F'를 보는 것도 재밌었던 포인트 중 하나. 식사 대접을 포함해 둘에게서 크고 작은 배려를 받았다. 사진은 정작 파리에 사는 자신들은 타본 적 없는 Vélib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내가 더 빠리지엔 같다며 그들이 재밌어 하며 찍어준 것. 빠르게 움직여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사진 속 내 모습을 볼 때면, 밤늦게 돌아가는 나를 걱정하며 끝까지 봐주고 연락해주던 따뜻함이 함께 떠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Dijon. 맛있기로 유명해 꼭 가보고 싶은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의 일정이 겨우 24시간에 가까운 터라 도착한 당일 점심 식사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기차 시간을 감안하면 오후 2시는 돼야 식당에 도착할 듯해 사전에 문의를 했더니 기꺼이 와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별 문제 없구나 싶어 편한 마음으로 식당에 갔고, 기대만큼 훌륭한 요리를 맛있게 먹었고, 그 사이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손님들을 보며 무언갈 깨달았다. '아 나 때문에 일부러 늦게까지 여신 거구나!' "멀리서 오시는 거니까 배려하고 싶었어요. 파리보다 더 먼 데서 오는 건 설마 했지만." 나의 심증은 정중한 서버의 대답을 거쳐 확증이 되었다. 코스 중 가장 훌륭했던 사과 타탱(Pomme tatin)만큼 달달했던 확증.
한 나절이면 얼추 다 둘러볼 수 있는 Dijon에서 더 의미있게 남아있는 기억은 도시 자체보다 스쳐간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처음 날 맞아준 에어비엔비 주인 Jean-Philippe 부부 역시 Dijon의 날씨마냥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내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 주고, 체크인 시간 전에 도착해선 더위를 못 이기고 버려두다시피 벗어놓고 나온 외투까지 반듯하게 챙겨주고, 다음날 체크아웃 후 차를 렌트하러 간 나를 위해 주차 자리를 봐준 것까지 고마웠다. 우리 부모님 뻘이라 더 감사했던 것 같기도.
차를 끌고 달려간 곳은 Beaune. 부르고뉴 와인 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로, 와이너리 투어를 위해 향하게 된 곳이었다. 달리는 내내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포도밭을 가로지르며 이미 신이 났는데, 와이너리에서의 경험 또한 아주 재미있었다. 내가 예약한 투어는 스스로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정해진 장소에서 화이트 3종&레드 3종을 테이스팅하는 셀프 가이드 코스. 화이트 3종을 먼저 맛본 뒤 이런 저런 정보를 읽으며 와이너리를 둘러보다 레드와인을 맛보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와인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에게도 부르고뉴 와인 특유의 상큼함과 산뜻함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의 내 리액션 또한 인상적이었을까(?) 레드와인 담당 소믈리에가 갑자기 "이것도 한 번 맛볼래요?" 하며 다른 병을 꺼내왔다. 그렇게 근처에서 한 병... 선반에서 또 한 병... 다른 저장고에서 또 한 병... 그가 새롭게 꺼내오는 와인들은 코스에 포함된 기본 맛보기용보다 압도적으로 훌륭했고, 나는 "이따 꼭 이것들을 사가야겠어요. 사진 좀 찍어도 되죠?" 하고 사진을 찍었다.
투어를 마치고 매장에 올라가 해당 와인을 찾으려 폰을 꺼내들 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아까 찍은 사진이 이 꼴일 줄이야... 당황한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샵에 있던 사장님께 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혹시 이 와인이 뭔지 아실까요? 직원이 몇 잔 더 줘서 제가 와인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얼굴이 지금 좀 빨갛긴 하지만, 절대 취한 건 아니랍니다... 사장님이 픽 웃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까 그 레드와인 담당자인 듯한 사람에게 "너 이 매력적인 여성 분께 도대체 뭘 내준 거니?"라며 농담조로 책망하며 확인을 하였다. 아쉽게도 그가 내주었던 와인은 다음날이나 되어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서, 아침에 떠나야 하는 나는 아쉬움(과 알딸딸함)을 안고 와이너리를 나섰다. 광량이 모자란 곳에선 절대 인물사진 모드로 촬영하지 말자는 교훈과 함께.
시골 인심이 넉넉하다는 말은 프랑스에서도 통하나보다. 파리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나 여행할 때 크게 불친절한 언행을 겪은 적이 없어 몰랐는데, 하룻밤 새 Beaune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다정하고 친절하였다. 나의 에어비앤비 호스트 Alexandra 역시 본인의 집만큼이나 멋지고 시원시원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추천해 준 와인바 역시 이번 여행 중 방문한 곳들 중 가장 따뜻한 공간이었다.
'힙하고 쿨'하면서 동시에 '따뜻하고 온화'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데 이 와인바가 그랬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가장 큰 이유는 이 트렌디한 공간을 온 세대가 함께 즐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서울에도 멋진 공간이 많지만 부모 세대와 다함께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쉽지 않다. 반면 이 바는 2-30대 뿐만 아니라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생일파티 모임, 간단한 식사 겸 와인을 즐기러 온 할머니 할아버지 등 다양한 세대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곳의 유일한 아시안 1인 손님인 내가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을테다. 들어오면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 애초에 없는 공간이니까.
실제로 쭈뼛쭈뼛 입장할 때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나에게 눈짓손짓을 섞어 '여기 진짜 괜찮아!'하고 맞아 주었고, 모 와이너리의 마케팅팀에서 일한다는 친구는 내가 음식을 주문하기도 전에 나에게 레드 와인 한 잔을 사주며 환영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 구역 최고의 인싸인 양 내 또래 모임에 섞여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마침 자신들의 모임에 좋은 일이 있어 좋은 와인을 여는 날이라며, 날더러 운이 좋다며 귀여운 생색을 내는 것도 기분 좋게 들으며 "Santé(건배)!"를 외쳤다. 서버들 또한 무척 친절했는데, 내가 혼자 자리할 때부터 신경을 써주던 한 서버는 손님이 어느 정도 빠지는 밤 시간이 되자 내 곁에 잠시 자리를 잡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인은 프랑스 남부 지역의 대학에서 소믈리에학을 전공하였고, 동기들 중 부산 출신의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이 친숙하고 좋다며 깨알 에피소드들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사진에서와 같이 진심으로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던,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밤이었다.
여행의 모든 순간이 완벽하게 기쁠 수만은 없지만 결국 다정하고 즐거웠던 때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행 중 깃드는 따뜻함은 오롯이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너의 역할과 책임은 벗어 던져도 무방하다'는 축복이 선언된 곳에서 나의 경험과 취향, 생각은 그 어느 스펙보다 더 중요한 안주가 된다. 대화와 만남을 거치며 나는 양껏 자유로워지고 깊어지기를 작정한다. 테이블 위 잔 안을 감도는 기포를 보며, 줄어가는 와인의 진한 빛깔을 보며 나를 투영해보곤 다시 깨닫는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원하......는지는 몰라도 여행을 구원하고 나를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