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제대로 된 26인치 캐리어를 샀다. 옷도 부족하지 않게 넣고 심지어 영어 공부할 책도 쌌다.
12월 10일 해뜨기 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항상 그렇듯 혼자 공항에 앉아 있는 건 쓸쓸하고 어색했다. 몇 번을 비행하든 상관없이 인파에 주눅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공항과 비행기는 바쁘고 빛나는 어른들의 세계였고 내게 익숙한 세계와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그날따라 인천 공항의 안개가 심했다. 비행기는 3시간 연착되었다. 폴란드에서 파리로 가는 경유 비행기는 놓치게 될 터였다. 이런 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걸 처리할 정도의 영어 실력은 안 되고 폴란드어는 더 못하는데 비행기를 놓치다니. 폴란드 공항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면 어떡하지.
거기다 원래 파리에 떨어지는 시간도 저녁인데 여기서 더 늦어지면 아예 새벽에 떨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밤의 파리는 무섭다. 소매치기, 강도, 테러, 강간 같은 무서운 단어들이 떠올랐다.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현실적인 최악의 상황과 해결법을 미리 떠올리려 애썼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최악이라고 해봤자 호텔값 날리고 안전한 폴란드 공항 내부에 하루 더 있거나, 애런을 하루 늦게 보는 것뿐이다. 아니면 파리에 밤늦게 도착하거나 혹은 (피 같은 돈이지만 강도당하는 것보다는 나은)택시비로 8만 원 정도 쓰는 것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최악이라고 해봤자 해결 가능한 수준이었다.
폴란드 공항에 도착하니 나처럼 경유 비행기를 놓친 사람들이 많았다.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들만 따라가서 여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됐다. 다음 파리행 티켓을 받고선 너무 피곤해 공항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잠이 들락 말락 꾸벅거렸다.
3시간 정도 더 있다가 다음 파리행 비행기를 타고 밤 열두 시쯤 되어 샤를드골 공항에 내렸다. 공항 곳곳에 불이 꺼져 있었고 짐 찾고 나가는 길에는 택시 기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니하오, 곤니치와를 수없이 들으면서도 시선은 앞에 고정하고 동요하지 않은 척 걸었지만 혹시 이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면 어떡하지 또 걱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 길을 찾지 못해 같은 길을 왔다 갔다 하자 기사들마저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두려웠다. 지금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 왜 이리 많았는지 모르겠다. 긴장 좀 늦추고 여행을 더 즐겼어야 했다.
결국 최악보다는 나은 시나리오로 새벽 1시쯤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내 인생에서 신체적으로 가장 피곤했던 날을 고르라면, 백화점에서 열 시간 서서 일했던 날도 아니고, 바로 그 날이다. 강도, 해외 미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전의 걱정은 다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엎어져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무의식인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여행을 하며 느낀 거지만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는 걱정만큼 흔하지 않다.
원래 바로 다음 날 애런네 집으로 가기로 했지만 파리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피곤해서 다음날 이동 걱정 없이 자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오늘 놓친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음날 아침 8시쯤 밖으로 거리 구경을 나섰다. 당시 파리는 노란 조끼 시위와 함께 교통 파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지하철과 버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손이 얼어버리는 12월에 걸어 다녀야 했지만 한국의 겨울보다는 따뜻했다. 출근 시간대의 거리는 바쁜 사람들로 가득했다. 원래 파리가 그런 건지, 그때 사회적 혼란이 심해서인지 진짜 총을 든 경찰들이 돌아다녔다. 지금 보니 군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군대에서 쓸 법한 큰 총을 목에 메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정말 한국에 있는 건 아니구나 실감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외국 나와서 그럴듯한 카페나 식당에 가본 적은 손에 꼽는다. 10개월의 여행을 통틀어 세 번 정도 가봤을까. 혼자 여행하면서 비싼 값을 내야 하는 식당에 가는 데 의미를 찾기 힘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눅이 들어 무서웠다. 직원들이 내 촌스러움과 다름을 보고 비웃을 것 같았고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인종차별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알려줄 것 같았다. 대부분 끼니는 베이커리나 KFC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때웠다.
파리에서는 한 번 용기를 내어 할아버지 웨이터가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웨이터는 친절하게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동양인에게는 구석자리를 준다, 바가지를 씌운다 하도 인종차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어딜 가나 내가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과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식당이 더 많다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 편하게 먹고 순간을 더 즐겼어야 했는데.
대충 메뉴판에서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같은 걸 주문했다. 웨이터는 영어를 하지 못했지만 구글 번역기로 어찌어찌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식당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원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고 내가 거지처럼 먹든 신사처럼 먹든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내가 여기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카페뿐 아니라 식당, 가게, 워커웨이에서까지 항상 무의식적으로 내가 여기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다 진짜 어른 같았다. 카페에서 이목을 끌지 않고 주문할 줄 알았고 강가에 놀러 갈 때는 뭘 챙겨야 하는지 알았으며, 식사 자리에서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타이밍 맞게 자기 말을 할 줄 알았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했고 스스로와 세상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같았다. 나를 제외한 그들은 세상 사는 법을 아는 어른들이었다. 반면 나는 기본적인 대화를 따라가기도 벅찼고 카페에서 주문하는 법도, 강가에 놀러 갈 때 챙겨야 할 것도, 여기서 기대되는 기본 매너가 뭔지도 몰랐다. 완벽한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범위의 상식과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의 좌절감은 예상보다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겼던 나를 표현하는 수단인 언어는 모국어가 사용되는 좁은 땅을 벗어나자마자 힘을 잃었다. 동시에 모국어 위에 쌓인 정체성도 증발했다. 자연스러운 인사, 농담, 말투, 넉살, 고차원적인 어휘들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긴장하고 딱딱해졌으며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영어를 쓸 때의 내가 한국어를 쓸 때의 나와 너무도 달라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떻게든 간격을 좁히고 싶었지만 입은 머리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고 바보 같은 모습은 매 순간 스스로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정체성이 위태로워질 줄은 몰랐다. 앞으로 10년을 외국에서 산다고 해도 한국어를 쓰는 나의 성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애초에 두 언어가 가지는 느낌과 표현이 달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언제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가장 나다운 나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건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을 준다.
숙소를 한인민박으로 옮기고 나서 다시 삼십 분을 걸어 크리스마스 마켓에 들렀다. 파리 번화가의 넓은 튈르리 정원이 뱅쇼Vin Chaud(향신료와 과일을 넣어 끓인 달달한 레드와인. 유럽의 크리스마스 음료다. 한국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포트와인이라는 이름으로 판다), 크레페, 수공예품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을 주머니 밖으로 내놓고 다니기 힘든 추운 날씨였지만 마켓 주변은 묘하게 따듯해 보였다. 친구들, 가족들, 연인과 함께 온 이들은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뱅쇼를 들고 있었다. 웃음, 뱅쇼, 크리스마스 전구는 그 순간 내가 바란 모든 것이었다. 잠시 나도 저들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혼자 여행하는 동안 외로움은 언제나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그러진 못했다. 읽고 쓰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 언어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정체성과 일상생활의 변화와 더불어 표현의 좌절을 가져왔다. 누구도 완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과 주변에 물리적으로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은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되어 여행 내내 나를 괴롭혔다.
잠깐 동안 나도 옆에 뱅쇼를 나눠 마실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기한 수공예품을 보며 함께 즐거워하고 같은 것을 보며 웃을 누군가를 바랐다. 애런과 크리스티나, 리아가 있는 영상 메시지 방에서 실시간으로 영상을 주고받는 동안 누군가와 함께인 척할 수 있었지만 곧 허무함이 밀려왔다. 크리스마스 데코에 둘러싸여 한 손에 뱅쇼를 들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난로 옆에 있기까지 했지만,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대신 휴대폰 화면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크리스마스의 느낌을 야금야금 앗아가 버렸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혼자서도 잘 살 사람인 줄 알았다.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있는 게 불편해서 평생 혼자 일하고 혼자 살면서 옆에 좋아하는 책들을 쌓아두고 잘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 타지에서 적극적으로 나를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모조리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외로움을 잘 탄다. 3일 이상 집에만 있는 걸 못하고 친구든 교수님이든 카페 직원이든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도 타고난 성격이 내성적이라 돌아다니면서 모임에 참가하거나 MT를 가진 못한다. 5인 이상이 모이면 불편하고 어색해서 말도 잘 못 한다. 소속이 바뀌면서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야 할 때면 적응에 시간이 걸린다. 주로 사람에 적응하는 시간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사람들과 있을 때 불편했던 기억들을 바탕으로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떠나고 보니 정작 불편했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 때문에 인생이 굴곡지고 재미있고 의미 있었는데 단지 그걸 사람들 때문에 인생이 힘들다고만 생각했다. 파리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홀로 김이 오르는 뱅쇼를 마시며 그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