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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얼티밋 Feb 07. 2022

30. 와인과 도자기




철도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한다. 기차지하철, 버스 역과 정류장을 중심으로 운행되는 이동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개념적 거리가 지리적 거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지, 동서남북 어디로 방향을 꺾고 있는지 모른다. '방금 평내호평역 지났어' 라고 말하거나 '두 정류장 남았어'라고 말하며 '역' 또는 '정류장'이라는 개념적 거리를 단위로 위치를 가늠한다.


지리나 지역명이 완전히 낯선 외국에서는 이 현상이 더욱 도드라지는 듯 하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워커웨이를 할 집은 피렌체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필리네 발다르노Figline Valdarno역에서 또 차로 20분 넘게 산골로 굽이굽이 들어가야 나왔다. 실제 마을 이름보다도 '필리네 발다르노에서 워커웨이를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실제 마을 이름은 폰테 아기 스톨리Ponte Agli Stolli, 산골에 집 몇 채, 태양, 계곡이 있는 작디 작은 동네다(다행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위치 정보도 함께 기록되어 구글맵에서 찾아보며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이탈리아어로 폰테 아기 스톨리Ponte Agli Stolli는 '바보의 다리'라는 뜻이다).




필리네 발다르노 역에서 내리자 호스트의 딸인 소피아가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소피아, 맞지?"

"응, 앞으로 2주 동안 지내는 거지? 반가워. 근데 오늘 역에서 한 명 더 픽업해야 돼. 사라라고 엄마 도예 인턴으로 있는데 네 룸메이트야. 어제 피렌체에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해서 오늘 너랑 같은 기차를 타고 온댔거든."


소피아는 금발 곱슬 머리에 잘 웃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스물 다섯 정도 된 소피아는 피렌체 대학에서 공부했고 영국에도 갔다왔으며 영어가 흔하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영어를 매끄럽게 할 줄 알았다(사실 여행 중 만났던 외국인들의 나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 살 차이로 누가 아래고 누가 위고 이런 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영어에 존댓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대충 이십대 초반, 중반, 후반 이런 식으로 뭉뚱그리고 지내다보면 저절로 잊게 된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까지 모두 능숙하게 했다.


우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동안 도예가 인턴이자 나의 룸메이트 사라가 우리를 먼저 찾았다.


"안녕, 새로 온 워커웨이어 친구 맞지?"


사라는 밝은 갈색 머리에 나와 비슷한 키, 개성이 드러나는 패션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라와 사라의 여동생은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다. 친구를 보러 하루 피렌체에서 자고 왔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투에서 확실한 잉글랜드 발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새 해는 져 있었고 우리는 다 함께 소피아의 차를 타고 깜깜한 산길을 달렸다.


"그래서 넌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 워커웨이 하면서 여행하고 있고, 지금까지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해봤어. 여기 다음에도 영국으로 다시 넘어가서 워커웨이 할 생각이야."


내가 영국에 가봤다는 소식에 사라가 눈을 빛냈다.


"영국 어디에 있었어?"

"혹시 데본에 다트무어 국립공원 알아? 거기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동네에 있었는데."

"...뭐? 다트무어? 우리 집이 거기 바로 옆인데?"


알고보니 사라의 집과 내가 있었던 리드포드는 다트무어 구릉을 끼고 정반대에 위치해있었다. 다트무어 국립공원이 아주 커서 엄청 가깝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았다. 그 넓은 영국 땅에서 어떻게 둘 다 다트무어 옆에 있었는지 신기했다.


"그럼 이번에 영국 가면 어디 갈 생각이야?"

"일단 저번에 갔던 그 다트무어 옆 동네에서 머물다가 토트네스Totnes라는 동네에 잠깐 가보고 싶어. 전환마을 운동으로 한국에서 책도 나온 곳이거든."

"토트네스가? 거기 우리 바로 옆 동네인데! 그 조그만 동네가 한국 책에 나왔다니까 신기하다."


전환마을, 사회적 경제로 유명한 토트네스는 사라가 사는 벅퍼스트리Buckfastleigh에서 차로 15분이면 가는 곳에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야지 가야지 생각했던 토트네스인데 불과 15분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를 그것도 이탈리아에서 만나다니 신기한 우연이다.




데본과 토트네스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면서 어두운 산길을 차 헤드라이트만으로 비추며 올라왔다. 굽이굽이 올라온 산 중턱에는 집이 몇 개 모여 있었고 우리는 그 중 외벽이 분홍색으로 칠해진 소박한 집 앞에 멈춰섰다. 그곳이 소피아의 가족들이 사는 본채였고 사라와 내가 지내게 될 별채까지는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그들의 포도농장도 내가 지낼 별채 가까이에 있었다.


마당을 지나 본채 문을 열자 주방과 바로 이어지는 거실이 나왔다. 단차가 있는 한국식 신발장과 현관은 없었지만 출입문 바로 옆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흙 묻은 부츠와 운동화들이 눈에 띄였다. 실내화 같은 것은 딱히 없었고 소피아와 사라는 익숙하게 신발을 벗어놓고 양말만 신고 들어갔다.



거실은 한 눈에 들어올 정도의 아담한 크기였다. 텔레비전 같은 것은 없었고 중앙에 6인용 식탁이 놓여 있었다. 어두운 조명등이 식탁과 식탁 옆으로 놓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어스름히 비췄다.


거실 바로 옆으로는 넓고 마찬가지로 노랗고 어두운 조명이 달린 주방이 보였다. 주방에는 이제부터 내게 농사일을 가르쳐줄 소피아의 아버지, 마시모Massimo가 서랍장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사라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내 이름을 섞어가며 이탈리아어로 내게 말을 건넸다.

 

"네..?"


그는 한층 목소리를 높여 다시 이탈리아어로 말을 했다. 나는 내 이름 빼고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고 보다 못해 옆에 있던 사라가 나섰다.


 "오늘 저녁으로 오믈렛 먹을 건데 네 오믈렛에 뭘 넣어주면 좋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아, 그렇구나."


하지만 내가 마시모의 말을 이해한 것과는 별개로 일단 오믈렛 내용물을 고를 수 있다는 것부터 내가 아는 일반적인 오믈렛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할 말을 고르지 못해 벙쪄있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뭔지도 몰랐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믈렛에 주로 뭘 넣어먹지? 당근, 양파 이런 걸 고르면 되는 건가?


내가 어리벙벙해 있자 사라가 다시 한 번 나섰다.


"나는 치즈랑 브로콜리 넣어먹을 거야, 베지테리언이라. 보통은 치즈랑 햄, 녹색 야채 같은 게 들어가. 그 중에서 넣어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넣으면 돼. 고기 먹어? 그럼 치즈랑 햄은 어때? 제일 무난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고개만 연신 끄덕이면서 사라 말대로 가장 무난한 선택지로 가기로 했다. 마시모에게 영어로 치즈와 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계속 이탈리아어로 나와 대화를 이어갔고 사라가 옆에서 열심히 통역을 해줬다.


"사라, 이탈리아어 할 줄 알아?"

"말은 잘 못하고 거의 알아듣는 것만 해. 여기 온 지 다섯 달 정도 됐는데 올 때는 단어 하나도 몰랐어. 와서 배운 거야."


사라는 이탈리아어 책을 본 적도 없고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다고 했다. 그냥 일하면서 소피아와 마시모를 보고 배운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탈리아 가족들이 서로 이탈리아어로 하는 대화를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고 내게 통역도 술술 해줬다. 사라는 영국인이지만 아빠가 네덜란드 사람이고 네덜란드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둘 다 했고 이탈리아에 온 후부터는 이탈리아어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 집에는 언어마술사밖에 없다.


그리고 눈치로 보건대 마시모도 내가 영어로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단지 대답만 이탈리아어로 할 뿐이었다. 사라가 살짝 귀띔해주기를 마시모도 영어를 잘 한다고 한다. 단지 집에 오는 인턴과 워커웨이어들이 이탈리아어를 더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탈리아어로만 대답을 하는 거라고. 이 전략은 사라와 내게 아주 잘 먹혔다. 나도 마시모와 직통으로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아깝게도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마시모는 60대 초반에 머리칼은 이미 은색으로 다 변한 듯 보였고 폰테 아기 스톨리 토박이라고 했는데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던 그가 어떻게 영어를 다 알아듣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슬쩍 물어보니 20대 초반에 미국인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영어도 그녀에게 배웠단다.

 



이탈리아식 오믈렛은 달걀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식 전이 부침가루 반죽을 베이스로 이것저것 넣어 만드는 거라면 이탈리아식 오믈렛은 부침가루 대신 달걀을 베이스로 만드는 전이다. 치즈와 햄으로 짭조름하게 간을 맞추고 기름을 둘러 폭신하고 노릇하게 구워낸다.


마시모가 요리하는 걸 보며 소피아와 사라와 떠들고 있었는데 2층에서 소피아의 오빠와 그 여자친구가 내려왔다. 그들도 입맛에 맞게 마시모에게 주문을 하고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마시모가 이 집의 요리담당인 모양이었다.

 

다들 마시모가 건네준 자기 접시를 들고 식탁에 앉았고 소피아의 엄마 헬렌Helen도 내려왔다. 헬렌은 전문 도예가로 주문을 받아 식기를 만들기도 하고 예술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내가 방문하기 몇 달 전에는 한국에서 열린 도예 축제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헬렌은 한국의 도예 수준과 예술 수준이 아주 높다고 칭찬했다. 한국 사람들의 패션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사람들 스타일도 좋고 잘 꾸미고 싸고 예쁜 옷도 많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앞에 있으니까 하는 빈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내면서 알게 된 헬렌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녀는 절대 빈말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믈렛은 간이 딱 맞고 부드러웠다. 달걀 표면 위로 기름이 반짝거렸지만 느끼하지도 않고 폭신폭신했다. 첫 날은 너무 긴장해서 식사 테이블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인분치고 양이 굉장히 많아서 배가 불렀던 것과 식사 후 보드게임을 했던 것만 기억난다. 밤이 깊어지자 소피아는 나와 사라를 데리고 내가 지내게 될 별채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다시 차에 올라 5분 정도 구불진 산길을 달려 폰테 아기 스톨리 마을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밤중이라 건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꽤 큰 2층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소피아는 건물 진입로에 차를 대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오래된 농가주택 같은 집은 겉으로 볼 때는 2층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3층이 되었다. 집이 서 있는 지대가 진입로보다 한 층 낮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집이 깊었기 때문이다.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과 헬렌의 작업실은 가장 낮은 지대에 그것도 외부로 바로 통해 있어 한 층이 더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바로 보이는 널찍한 방은 공사중인 1층이었다. 사포질을 하는 샌딩머신과 전동 드라이버, 연결되지 않은 전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샌딩 작업의 결과로 보이는 먼지쌓인 작업용 부츠 한 켤레도 보였다. 거기서 계단을 한 단 올라가면 유리문이 달린 헬렌의 사무실과 도자기를 굽는 가마, 작품 보관실이 있었다.


사무실을 바라본 상태로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제일 낮은 층에 위치한 헬렌의 작업실이 있었다. 작업실에는 통 유리창에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도 있어서 빛도 잘 들고 공간도 넓어보였다. 도예 도구와 물레, 재료 등이 모두 있어서 사라와 헬렌은 주로 이 공간에서 하루를 보냈다. 헬렌의 지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도예클래스를 들으러 오기도 했다. 헬렌이 직접 구운 예술적인 세면대가 놓인 화장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내 방이 있는 곳은 사무실을 바라본 상태로 왼쪽에 있는 계단을 타고 두 단을 올라가면 있었다. 첫 계단 한 단을 올라가서 처음 나오는 공간은 계단과 구분하는 문이 따로 없었지만 방 하나 정도의 크기로 꽤 컸고 구석에 침대와 선반이 놓여 있어서 조금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방으로 쓸 만했다. 그 문 없는 방 안에는 다시 문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내가 쓰게 될 욕실, 하나는 사라의 방으로 이어졌다. 뭔가 복잡하고 신기한 구조인 집이었다. 사라의 방 안에는 다시 전용 테라스와 욕실이 달려 있었다.


문 없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두 번째 계단을 올라가면 내 방이 있었다. 건물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였고 넓고 휑한 방이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과 덧창이 달린 창문이 있었고 방 안에는 킹 사이즈 침대와 협탁, 벽 한 면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행거가 전부였다. 화장실을 가려면 계단을 한 단 내려가서 사라 방 옆까지 가야 했지만 말이 계단이지 사실 가까웠다.


아쉬운 점이라면 내 방에서는 창문 앞에 딱 붙어 있어도, 창문을 열고 팔을 밖으로 뻗어도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와이파이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통화 신호조차 잡히지 않을 줄은 몰랐다. 노트북에 다운받아놓은 영화 몇 편으로 힘겨운 2주를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대신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딴 짓 할 수가 없어서 숙면을 취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본 정면 천장에 큰 창이 달려 있어 아침이면 해가 바로 들어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강제 디지털 디톡스랄까.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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