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의 평일 일과는 항상 비슷했다. 8시쯤 일어나 사라가 좋아하는 펜넬Fennel(한국에서는 회향, 산미나리) 차를 끓여놓고 식빵이나 곡물 식빵 비스킷에 살구잼을 발라먹었다. 오렌지로 아침을 대신하기도 했다. 마을 식료품 가게에서 파는 오렌지는 내가 여태껏 먹어본 오렌지 중 가장 달고 맛있었다. 과육이 탱글탱글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과육 속에 마치 모세혈관처럼 붉은 색 피가 도는 특이한 오렌지였다. 찾아보니 블러드 오렌지라고 지중해 연안에서 자라는 오렌지 품종 중 하나라고 한다. 오렌지 중에서도 맛있는 오렌지라고 한다. 가끔은 이렇게 여행지에서 싹튼 호기심이 집에 와서 해소되기도 한다.
뜨끈한 펜넬 차로 아침의 냉기를 쫓아내고 씻고 나오면 9시쯤 소피아와 마시모가 헬렌을 작업실에 내려주고 나를 밭으로 데려가기 위해 들른다. 소피아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고 마시모의 베스파 뒤에 타기도 한다. 그가 가져다준 헬멧을 쓰고 뒤에 타는데 항상 어디를 잡아야 할지 몰라서 애매하게 마시모의 어깨를 꽉 잡고는 했다. 사라는 헬렌과 작업실에서 낮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아침과 저녁, 그리고 주말에만 나와 시간을 보냈다.
마을 성당을 지나 베스파로 5분 정도 가다보면 철 대문과 높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밭이 나온다. 밭은 마시모의 부모님이 쓰시던, 지금은 사실상 먼지만 쌓여가는 버려진 농가주택과 이어졌다. 점심은 주로 내가 지내는 별채 주방에서 요리해 먹었지만 가끔 가게에서 포카치아 샌드위치를 사서 버려진 농가주택 주방에서 먹기도 했다. 식사 후에는 아직도 가스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놀라며 에스프레소를 끓여 마셨다. 정말 전통 집인 건지 주방 식탁 바로 옆에는 화롯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과 굴뚝이 있어서 거기에 자른 나뭇가지들과 버리는 종이들로 불을 피우고 손발을 녹이며 에스프레소로 점심을 마무리하고는 했다.
농가주택 1층은 거의 창고로만 쓰는 듯 했고 거기에는 농사일에 필요한 온갖 도구가 다 있었다. 정원 가위와 톱, 칼, 마체테 같은 정글도와 낫도 있었다. 내가 주로 썼던 도구는 포도나무를 다듬기 위한 작지만 아주 날카롭고 힘이 강한 정원 가위와 가위를 차고 양손을 편하게 쓸 수 있는 가죽 허리띠였다.
내 발에 너무 커서 걸을 때마다 헐떡거렸지만 배수가 좋지 않은 곳은 발이 푹푹 빠지는 구간도 있기 때문에 필수인 고무 장화로 갈아신고 허리에는 정원 가위를 넣은 허리띠를 매면 밭으로 출격할 준비 완료였다.
몇천 평은 될 법한 밭 초입에는 포도가 아니라 올리브나무들이 있었다. 올리브 나무들을 지나고 마시모가 양파와 토마토, 당근 등 식재료를 기르는 작은 식용 밭도 지나 탁 트인 공간으로 나가면 철사와 포도나무가 끝없이 보이는 밭이 나온다.
이렇게 탁 트인 공간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림자 따위는 없었고 2월이었음에도 한낮의 이탈리아는 꽤 더워서 안에 꼭 반팔을 안에 입고 나가서 중간에 옷을 한 겹 벗고 일해야 했다.
끝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넓은 공간에 포도나무들이 세로로 꽂힌 철사를 따라 하늘로 50cm 정도 움터 있었다. 철사들은 철조망처럼 세로대가 중간중간 몇 개씩 서있고 이를 십자로 가로지르는 가로줄들이 네 개 가량 수십미터씩 줄지어 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직으로 자라는 포도나무 줄기를 조심스럽게 90도로 꺾어 가로 철사줄을 타고 옆으로 자라게 돕는 것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포도를 수확하기 쉽다고 한다.
줄기가 너무 건조하거나 힘을 세게 주면 바로 팍 하고 부러지기 때문에 부러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힘을 주어야 했다. 줄기를 마사지하듯이 살짝 부드럽게 쥐고 옆으로 꺾어 묶어주면 됐는데 첫 시도에서 줄기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톡.
그것도 마음 아프게 크게 톡 소리를 내며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부러졌다.
"미안해. 이렇게 쉽게 부러질 줄 몰랐어."
"괜찮아. 나도 가끔 부러뜨려. 힘을 거의 주지 말고 줄기 중심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꺾어주면 돼. 천천히 해도 되니까 계속 연습해봐."
그 뒤로 맹연습을 했다. 원래도 손이 느린데 포도나무 줄기를 살리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다보니 소피아와 마시모가 한 줄을 끝낼 동안 고작 반절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속도를 낼 수도 없고(내 실력으로 그랬다간 애꿎은 포도나무들만 죽어날 게 뻔했다) 그냥 천천히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동안 서로 대화를 하기도 애매했다. 셋의 속도가 달라서 십 미터씩 떨어져 있는 건 기본, 가끔은 이삼십 미터씩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틀고 매듭질을 계속 했다. 운좋게 서로 가까워졌을 때 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다 같이 따라불렀다.
농장에 머무는 동안 이 포도나무 가지 꺾기와 사과나무 가지치기, 창고 문 고치기, 옥수수 수확하기, 와인 저장고 청소하기 등의 일을 했지만 약 80%는 이 가지 꺾기였다. 그냥 두 시간 내내 가지를 꺾고 점심을 먹고 세 시간 내내 다시 가지를 꺾었다. 네다섯 시 정도에 끝나면 다시 소피아의 차를 타거나 마시모의 베스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최고의 특전은 역시 질좋은 와인과 올리브오일 등 직접 기른 농작물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방 한 켠 철제 냄비 안에는 허니콤(벌집)이, 옆 플라스틱 상자짝 안에는 팝콘용 건옥수수가 통채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었다. 식탁 위에는 언제고 마실 수 있는, 라벨도 붙지 않은 이 집 레드 와인이 놓여 있었고, 바로 옆에는 이 집에서 직접 기르고 짠 이탈리아 최고의 선물, 올리브오일이 담긴 병이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와인을 즐긴다는 것은 진정 사실이었다. 독일 집에 있을 때는 술을 본 적도 없었고(이 집이 유독 술을 안 마신 것 같긴 하다) 영국에서는 저녁이나 주말에만 와인을 마셨다. 반면 이탈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평일 점심에 와인을 곁들여 마셨다. 단순히 포카치아 빵에 올리브오일을 적셔서 소금만 뿌려먹더라도 와인은 빠지지 않았다. 이 집이 와인 농가라 유독 와인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그래서 점심에도 자연스럽게 와인을 마셨을 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문화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방금 전에 와인을 마셨더라도 식후에는 꼭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여 마신다. 말 그대로 알코올과 카페인의 조화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귀국한 지금까지도 모카포트 사용법을 모른다. 항상 마시모나 사라가 커피를 만들어줬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다. 이래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면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나보다. 에스프레소는 소주잔 두 개 정도 될 법한 작은 잔에 따라 마셨다. 기본은 항상 에스프레스다. 우유는 없다(나는 설탕을 타 마셨다).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에서는 우유를 거의 마시지 않았던 것 같다. 치즈는 조금 있었던 것 같은데 버터와 우유는 거의 보지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라면 버터를 넣었을 곳에 다 올리브오일을 넣는 듯 하다. 아마 그 정도로 풍미가 좋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귀국 후 한국에서 이탈리아 요리법을 따라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올리브오일로는 그 맛이 나지 않고 느끼하기만 했다.
접시 구석에 올리브오일을 조금 부어놓고 포카치아를 찍어서 위에 소금을 뿌려먹는 것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기본빵과 올리브오일, 그리고 소금이라는, 이걸로 맛이 날까 의심되는 간단한 재료들만으로도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한 끼를 만들기도 했다.
또 하나의 별미는 수확철을 지나 바짝 마른 건옥수수로 해먹는 팝콘이었다. 마찬가지로 버터가 없으니 올리브오일로 팝콘을 튀겼다. 그냥 소금만 뿌려서 침대에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사라와 '위대한 쇼맨'을 보면서 먹었다. 우리한테 넷플릭스 같은 건 없었고 가진 거라고는 서로의 노트북에 저장된 몇 안 되는 영화가 전부였다.
앞에서는 강제 디지털 디톡스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나쁘지 않았다. 이탈리아 와인 농가는 아주 느긋했다. 다섯 시간씩 가지를 꺾는 동안 아무도 채근하지 않았고 해 뜨면 일하고 해 지기 직전 멈췄다. 직접 수확한 재료로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해먹었고 채식 요리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해가 진 마을은 고요했고 마을 안에 계곡이 있었다. 집 뒤에는 산과 버려진 성이 있어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소풍을 갈 수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외지인인 나와 사라를 반갑게 맞이해줬고 시골 마을임에도 끝내주는 피자 가게가 있었다. 겨울에도 해는 맑고 빛났다. 롱패딩이 필요없는 날씨였다. 원하면 아무 자극도 방해도 없이 조용히 나를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방해하고 싶어도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자기 전에는 자연스럽게 명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자극을 갈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폰테 아기 스톨리에 와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