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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Jul 23. 2020

골목길에서 만난 오늘

   

계약 건으로 남쪽의 도시를 다녀왔다. 약속과 약속 사이 공백이 생겨 유년시절을 잠시 보낸 동네를 들렀다. 골목길에 대한 향수와 지난 시간에 대한 적당한 호기심, 그리고 무언가 두고 온 아쉬움 같은 것도 한몫했던 듯하다.     


재개발로 아파트촌이 되었을 거라는 짐작이 빗나갔음에도, 찾아가는 동안 몇 번을 헤매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걷다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왔고, 기억과는 사뭇 다른 길을 통해서야 옛 동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우리의 기억은 자주 배신한다. 그리고 확인할 수 없으므로 그걸 진실로 받아들이고 산다.      


더 큰 당혹감은 정작 동네에 들어서고부터였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는 길과 집들이 수십 년 전과 너무 흡사했다. 철수네 가죽 공장이 지금은 복지관으로 바뀌었고, 두 곳이 나란히 있던 약국이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는 것만 달랐다. 동네 구멍가게야 남아있을 리 만무했지만 학교를 마치고 찾아가던 골목과 셋방이 있던 집은 그대로였다. 감나무는 베어지고 없었고 그때보다 많아진 가로등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더 좁아져 보이는 골목과 상처 난 벽의 페인트가 세월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왜 아직도 그대로인 것인지, 변하지 않은 것을 만나는 반가움보다 방부 처리된 기억의 흉터를 보는 것 같은 아픔이 앞섰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그 동네는 마치 수없이 돌고 돌아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걷는 내내 불편했다. 우리 가족이 왜 도시로 밀려들어와 그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미로를 헤매는 동안, 수십 년 전의 나를 내가 지켜보았다. 좁디좁은 주택에서 청춘을 뭉개고 있던 동네 형의 기타 소리가 왜 그리 우울했는지, 수돗가에서 양치질을 하던 누나들의 눈은 왜 항상 흐릿해 보였는지, 엄마는 왜 골절당한 아이의 팔뚝에 고약만 발라주고 말았는지, 학교에선 졸기만 하던 철수가 왜 여름방학마다 만화영화를 매번 보러 간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줄 수 있었는지, 넓은 한옥에 살던 지수네 엄마는 왜 내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며 자기 아들에게만 법랑 그릇에 게살을 발라 주었는지. 골목 안 철 대문들이 필름의 프레임이 되어 잊었던 시절의 진실을 들려주었다. 경전철이 지나는 대로변으로 탈출하고 연신 생수병을 들이켰다.   

  

잘난 줄로만 알고 한동안을 살았고, 잘난 척하며 또 그만큼의 세월을 낭비했다. 이젠 겸손해야 할 무언가를 지니고 있지 않아 오만할 기회도 거의 없다. 남들과 크게 엮이며 살 인과관계도 느슨하다. 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나는 왜 그곳을 끝내 찾아갔을까. 왜 그곳은 여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까. 내게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는 동안 경전철이 움직이며 그 외로운 섬이 멀어졌다. 나는 과연 그 골목길에서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남루하고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대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일까.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나는 오늘만 산다.”

한동안 수만 가지로 패러디되어 떠돌았던 원빈의 대사를 음식점 광고전단에서 다시 확인한다. 코로나로 한참 힘들었을 도시의 빛바랜 음식점 실내 인테리어가 코믹한 설정의 글귀를 자못 비장한 문장으로 읽히게 만든다. 오늘만 사는 것.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발생할 문제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혹은 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구처럼 쓰이지만, 그것만이라 단정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두 개의 제안을 들고 갔다 하나의 계약만 마치고 돌아왔다. 미래를 떠올리기보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도움될 정도의 희망만 안고 사는 요즘이다. 미래형보다 과거완료형 동사가 더 많이 떠오르는 시간이 찾아오면, 그냥 침묵하는 것이 옳다. 그날 분량의 생각과 움직임은 그날까지가 유통기한이라 여기며 오늘만 살기로 한다. 일기예보를 비웃듯 다시 장대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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