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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Jan 26. 2021

필요한 말을 나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

일상잡담

   

이런저런 기회로 차를 접할 기회가 많아진다. 일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신호 같기도 하다. 알아야 맛을 느끼듯 차 공부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게을러 자꾸 미루기만 하고 있다.     


지난주 지인이 새롭게 문을 연 티룸에 축하인사차 들렀다가 뜻하지 않게 홍차 관련 베스터셀러 작가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됐다. 사장님이 내어주신 흑차와 고지 베리가 블렌딩된 마리아주 프레르의 신년차를 마셔보는 호사도 누렸다. 문득 품질이 개선되었다는 케냐 홍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CTC라는 용어가 나왔다. 흔들리는 나의 눈빛을 확인했는지 저자 선생께서는 잠깐 멈칫하다 대화를 이어갔다. 입문서 한 권 읽을 때 얼핏 본 기억은 났지만 나 같은 차 문외한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CTC는 전통 공법의 잎차와 달리 품질이 일정치 않은 홍차들을 ‘부수고(crush), 찢고(tear), 말아(curl)’ 만드는 방법을 말한다. 원가를 낮춰 차의 대중화를 만들어낸 역할을 했다) 익숙하지 않은 전문용어 사용에 당혹해하는 표정을 들키면 난감해진다. 대화가 좀 더 확장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짐짓 알은체라도 하며 버텨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지식을 귀동냥이라도 할 수도 있다.     


예전만 해도 특정분야에서 쓰이는 용어에는 일본어가 많았다. 일본어라고 하기보다는 일본식 용어라는 표현이 맞겠다. 신문편집을 하던 시절에는 ‘와리스께’(지면 배열, 레이아웃), ‘미다시’(제목), ‘다대 편집’(세로 편집), ‘보카시’(그러데이션) 등의 용어가 일상처럼 쓰였다. 용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편집자는 작업자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출판 편집을 할 때는 ‘도비라’(중간 표지), ‘야래지’(파지), ‘돈땡’(같이 걸이) 같은 용어들은 기본적으로 꿰고 있어야 했다. 인쇄소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들에게 기죽지 않으려면 일본식 용어쯤 술술 구사하고 알아들어야 한다. 적당히 넘어가는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런 식으로 쓰인 일본식 용어를 전문용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용어, 혹은 개념은 작업이나 생각을 원활하게 해주는 언어여야 한다. 관행이 되고 의미 없이 쓰이는 언어는 용어가 아니라 사라져야 할 말이다. 작업 현장에서 그런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쓰였던 이유는 아마 편하기도 했고 그런 용어쯤 구사할 수 있어야 그 일에 대해 잘 안다는 편견도 있었기 때문 아닌가 싶다. 네가 모르는 걸 난(우린) 알아 같은 것 말이다. 배제와 차별의 언어였던 셈이다. 일본이 원조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변경 가능한 우리말이 있었음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런 관행에 변화가 생긴 것은 끝없는 선전과 독려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산업의 쇠락과 변화에 관련이 있다. 종이신문 제작은 부침을 거듭했고 편집 방식은 디지털로 넘어오며 관행을 깨부수었다. 아무나 할 수 없던 일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누구나 이미지와 텍스트를 편집해 출력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저런 용어들은 자연적으로 도태되어 가고 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문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언어는 능동적인 사고를 하고 정확한 의사 교환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언어가 있어야 삶이 가능해지고 타자와의 생각 공유가 가능해진다. 각자의 언어를 소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리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와 소속감을 나눈다는 것이고 배척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하지만 획일적인 언어의 일상화는 그 언어가 제안하는 세계관을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전문용어와 무리의 용어는 다르다. 전문용어가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용어라면 무리의 용어는 차별과 배제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언어다. 여러 분야에 남아 있는 일본식 용어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를 단순히 일본 잔재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나쁜 짓과 나쁜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듯, 언어도 마찬가지다. 모두(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지닌 용어로 바꿔 부를 수 있음에도 굳이 옛 현장 용어를 고집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기득권 보호에 대한 열망이 숨어 있다.      


‘야마’가 핵심과 같은 우리말로 확실히 대체된 것은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이 따로 있던 시절에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굳이 글 쓰는 티를 내고 싶은 사람들은 이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일상어, 혹은 친근한 언어인 한글로 용어가 표현되는 것은 동등한 위치를 가능하게 한다. “에바이텐으로 뽑아주세요” 대신 “8곱하기 10 크기로 뽑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누구나 사진을 다루고 사용하게 되었다는 증거다.     


연원은 밝혀주되 내 언어로 만들어가는 것은 주체적인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다.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말로, 마땅한 말이 없다면 처음 명명한 곳(사람)이 쓰는 언어로 이야기하면 된다. 보통 나에게 가르쳐준 곳이나 사람의 언어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항상 넓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패거리(지배적 집단)의 언어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내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 소통을 위해 타인의 용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오독을 막기 위한 정도로 공유하는 것에서 멈추고 얽매이지 말 것, 대신 나의 언어로 사고하고 상상하며 글의 문체, 말의 문체를 만들어갈 것, 언제나 갖고 살아야 할 명제가 아닐까.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_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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