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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pper Lee Apr 02. 2017

[리뷰]when breath becomes air

죽음, 삶과 죽음 사이의 틈


토요일 오후,

마치 알지 못하는 서로가 "서점에선 책읽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조용히 해야 해요"하는 약속을 한 것처럼  붐비지만 조용한 서점에 들렀다.


바쁘지만 다소 외로운 평일의 일과들과는 달리, 함께 있지만 조용한 서점의 안정감이 그립던 차였다.


서점에 발을 들인지 두 발짝 밖에 안되었을 뿐인데,정지된 상태로 한권의 책 제목에 매료되고 말았다.그 제목은 "When breath becomes air(숨결이 바람이 될때)"였다. 숨결이 바람이 된다니, 인간의 호흡이 자연의 바람이 된다니, 허전한 기분이 드는 제목이었다.


본래 버릇처럼, 목차 대신 책의 중간을 펴서 문장을 살폈다.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에 더 끌리는 편이었다"라는 저자의 회고가 와닿았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생과 죽음"이었고 저자가 끊임없이 연구하던 부분이란 걸 알고선 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스텐포드대학에서 신경외과 레지턴트로 일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따뜻한 가족이 있었다. 레지던트 마지막 해을 보내고 있었고 그가 꿈꾸던 이상인 신경외과의이자 신경과학자, 스텐포드 의대 교수로 채용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폐암말기"를 선고받았다.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그는 언제나 환자의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지만 더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과 남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서른 여섯인 그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은 그가 타인의 죽음을 이해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그의 삶을 회고하는 이 책은, 폐암 말기 선고가 그에게 가져다 준 변화를 아주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죽음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아가 이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연구하는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남은 시간이 10년이라면 신경외과의를 계속할 것이고 2년이라면 작가가 되겠다는 그의 고민은 언제나

계획적이고 삶의 의미를 궁구하던 그의 삶에 커다란 동요를 일으킨 듯 보였다.


하지만 동요가 그를 완전히 휩쓸진 못한듯 어디에서도 삶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얼마가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 앞에서, 더욱 삶의 의미를 지켜가려는 모습 뿐이다. 그의 삶은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는다.


필자는 처음에는 이러한 저자의 모습이 몹시 안타까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부숴진 몸을 이끌고, 이제는 그의 환자들이 아닌 그 자신을 상대로, 정면으로 죽음과 삶의 의미를 찾아 내려 하는 모습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I can't go on. I'll go on.(계속 갈 수 없지만, 계속 갈거야)" 그는 죽음의 직전까지 지치지 않았다.


그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확인하며, 그는 좌절 대신 남은 삶의 의미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는 그의 직업에 대한 소명(그는 항암치료 중에도 신경외과 수술을 담당하며 환자를 돌보았다. 환자를 앞에 두고 수술대에서 정신을 잃을 고통이 찾아오자 '진통제를 더 먹고 들어올걸'하고 후회하는 그의 모습은 처참하지만 열정적이다.), 아내와 딸 케이디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우정과 진심 중 그 어떤 하나도 놓지 않았다.

-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법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p.143)-


그는 참 인간적이었다. 마치 삶의 치열함 속에서 인간미를 잃어가는 우리들에게 "그건 구차한 핑계에 불과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직업, 가족, 친구, 그리고 그 외의 것들에서 그는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오히려 모든 것을 더 소중히 대했다. 단 하나의 삶의 가치도 놓치지 않고 부여잡으려는 것처럼.


아직 아빠를 알아보지 못하는 갓난 아이 딸에게 메세지를 남기듯, 그는 마지막 문단을 끝내고 만다.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책 마지막 문단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 엄청난 일이란다.(p.234)


나는 지칠때면 습관처럼 "에효. 삶이 뭔지."라고 말하곤 하는데, 작가 폴 칼라이티의 삶을 보면서 삶은 내가 느껴온 것보다 더 기쁘고 더 슬프고 더 행복하고 더 힘들 수 있는 것 같다. 또 어쩌면 삶은 더 희극적일 수도 비극적일 수도 있는 듯 하다.


그를 떠나보낸 후 그의 아내가 남긴 글의 일부를 가져온다. 이보다 그의 삶을, 어쩌면 우리의 삶을 잘 요약하긴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폴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폴은 비극이 아니었다.(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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