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프랑스 작가, 1930년대 그리고 2018년 지금의 이야기
고전의 부담스러움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새해의 빛바랜 희망을 체감하며, 마치 벽돌 같았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서머싯 몸의 '면도날(The Razor's Edge)'이다.
표지를 채우는 서머싯 몸의 옆모습은 자못 쓸쓸해 보이지만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작가의 모습은 마치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래리'를 떠오르게 한다.
나는 2018년에 살고 있고, '래리'는 1930년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한다. 마치 옆에서 대화하는 듯이 말이다.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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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 아닌가? -p.84
미국인이지만 파일럿이 되고 싶어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래리는 처참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삶에 커다란 "의문점"을 만든 사건이다. 그의 동료가 그를 구하고 대신 공격을 받고 사망하게 된 것이다. 래리는 동료의 죽음과 바꾸게 된 자신의 삶에 무언가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탱할 수 없음을 느낀다. 존재, 선과 악, 신 등을 탐구하기 위해 그는 구도의 여정을 시작한다.
때로 인간은 아주 작은 무언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눈앞의 사건과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나 기분이 흐르기도 하지. -p.88
보통의, 아주 일반적인 청년이었던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간다. 그의 타고난 왼발에 안정, 풍족, 사랑, 일상, 육체가 있었다면 그가 만들어가는 오른발에는 불안, 가난, 고독, 이상, 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왼발을 접은 채 오른발의 삶을 차근 차근 꾸려간다.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고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그 평온함, 품격, 명석함이란.. -p.122
안정된 직업을 거부하고, 떠도는 삶을 택한다. 심지어는 약혼녀였던 이사벨과도 파혼한다. 이사벨은 안정된 삶과 상류 문화, 사회적 인간관계를 꿈꾸는 현실적 인간이다. 그녀에게 정신적인 삶을 함께 살아갈 것을 제안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그녀를 떠난 래리는 미국을 떠나 수년 간 카톨릭 수도원과 인도의 브라만, 사목(승려) 활동을 통해 깨달음을 구한다.
그는 카톨릭(개신교)을 향해 묻는다. 일부러 시련을 주어 그걸 극복하면 은총을 주는 하느님이 옳으냐고. 이보단 훨씬 더 선량하고 현명한 '상식있는' 하느님을 믿고 싶다고 말이다.
선량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대체 악은 왜 창조한 겁니까? 수도사들은 자기 안에 있는 사악함을 무너뜨리고 유혹에 저항하며, 고통과 슬픔과 불행을 하나님이 정화를 위해 내리는 시련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수도 있다고 했죠. 그건 마치 심부름을 보내면서 길을 험난하게 만들기 위해 복잡한 미로를 만들고 해자를 두르고 마지막으로는 벽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미로를 힘겹게 통과하고 헤엄을 쳐서 해자를 건너고 벽을 허물어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상식이 없는 하느님은 믿을 수 없어요. 그보다는 이 세상을 창조하진 않았지만 악행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해 바로잡는, 인간보다 훨씬 더 선량하고 현명하고 위대한 신을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 -p.423
그리고 마두라이 불교 사원에 묵으며 스승 가네샤에게 묻는다. 이 세상이 절대자의 발현이라면 이 혐오스러운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이 세상을 절대자의 별현이요, 그 완벽성의 충일로 보았습니다. ... . 저는 이 세상이 완전한 존재의 본질이 현시된 것이라면 어째서 그토록 혐오스러울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얼마나 혐오스러우면 인간이 신 앞에서 세울 수 있는 정당한 목적이 오로지 그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느냐고 말이죠. -p.458
가네샤는 여러 가르침을 주지만 래리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보단, 그의 인자함과 위대한 정신, 성스러움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그리고 래리는 그 곳에 그가 추구하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걸 알고 그와 함께 생활한다. 단 한순간도 똑같은 강물은 없지만,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통찰은, 그가 현상의 고통, 즐거움, 슬픔, 기쁨 등의 영원성을 부정하고 무한한 존재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점점 그가 걷는 오른발에는 굳은 살이 배기기 시작하고 그의 마음은 한껏 평온해진다. 하지만 래리는 왼발을 접은 채 더이상 오른발로 계속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의 걸음은 현실의 충실성을 배제한 채 정신과 이상만을 좇는 미완성인 삶, 절뚝이는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제 안에 있는 에너지가 분출구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죠. 세상을 등지고 은둔생활을 하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닌듯 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p.460
그는 이렇게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직장에서는 두 발을 단단히 버티고 현실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 외의 시간엔 몇 cm쯤 바닥으로부터 떨어져 이상을 꿈꾸는 나의 정신을 그가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고, 2018년의 너도 그러냐고 말이다.
외면적으로는 그저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 온듯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내면에는 대중의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세계관이 아니라 그만의 실존적인 해답이 똬리를 틀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p.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