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에서 자라던 것들

이제는 사라진 것들에 대하여

by Peppone


아스팔트 위에서 그런 것들이 자라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고가의 화분을 놓고, 도로 화분에 들어갈 흙을 따로 사서 섞었다.

아무 흙이나 쓰지 않았다.

식물에 맞게 조제해서 썼다.

아스팔트 위에서 버티게 하려는 게 아니라,

살아가게 하려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멈췄다.

사진을 찍었고, 신기하다고 말했고,

꽃씨를 달라고 했다.

나는 나눠주었고,

그러면 누군가는 자신이 키운 꽃의 씨를 다시 놓고 갔다.

교환이라기보다는

묵묵한 인사에 가까웠다.


어느 날은 봉투 하나가 유리문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문구와

한자로 적힌 꽃씨 이름.

연락처는 없었다.


그 봉투를 놓고 간 사람은

수년 동안 나를 보아 왔다고 했다.

새벽에 물을 주는 모습도 봤다고.

그 말이 남았다.

내가 한 일이

누군가의 생활 속에

조용히 편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때는 꽃가게가 아니었다.

유리문에는 ‘온 게릴라 가드닝’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식물을 키운다는 판단이었다.

산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굳이 이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나의 아버지 김약사는 폐암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양약사였지만 한약에도 정통했다.

약의 체계는 달라도

몸을 읽는 기준은 하나라고 여겼다.


아버지는 약의 남용에 엄격했다.

증상을 묻고,

지금은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약을 팔지 않았다.

약은 쓰일 때만 쓰여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쓰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약을 약하게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조제한 감기약은 몹시 썼다.

그 맛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서 가끔 생각한다.

효과였는지, 신뢰였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하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독감은 지나갔고

몸은 회복되었다.

아버지가 만든 연고를 바르면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조제실에서

아버지가 조제봉으로 약을 빻고,

계량하고,

섞고,

시간을 재며 농도를 맞추던 모습은

지금도 정확히 떠오른다.


아버지는 석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연구 주제는 한국의 도라지였다.

도라지의 약성,

어디까지가 약이고

어디부터가 독이 되는지에 대한 연구.

그래서 아버지에게

한약과 양약은 대립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몸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담석증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골에서 소문을 듣고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아

아버지를 찾아왔다.

수술이 아니라

약으로 담을 녹인다는 말을 믿고서.


아버지는 외과적 처치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깊이 약을 다뤘다.

처방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지금 이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동양란을 잘 키웠다.

그래서 약국 안에는

일 년 내내

난 향이 옅게 퍼져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자랐다.

약 냄새와

꽃의 향을 함께 맡으며 살았다.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 향이 내 감각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산나리를 몇 개 키웠다.

산나리는 독성이 강한 식물이다.

특히 뿌리는 약성이 세다.

그래서 한약재로도 쓰인다.


독성이 강한데 폐에 좋다는 말은

처음엔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말했다.

독과 약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쓰임과 양, 맥락의 문제라고.


파르마콘이라는 말처럼

독은 적절히 쓰이면 약이 되고

약은 잘못 쓰이면 독이 된다.

산나리는 늘 그 경계 위에 있다.


아버지가 키우던 몇 개의 산나리를 떠올리며

나는 그것을 군락으로 만들었다.

개체를 늘린 것이 아니라

의미를 확장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판단이

도심 한복판에서

형태를 갖게 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산에서 맡을 수 있는 그 냄새를

내 건물 앞에 두고 싶었다.

그 냄새는 위안이었고

동시에 경고였다.

자연은 약하지만

그 약함 안에는 독이 있고

그 독은 때로 사람을 살린다.


이 모든 일은

공간을 꾸미기 위한 것도,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전략도 아니었다.


그건

나의 애도였다.


말로 하지 않은 것을

나는 흙으로 다뤘고,

식물로 옮겼고,

시간을 들여 군락으로 만들었다.

사적인 상실이

도심에서 조용히 지속되는 방식이었다.


그 시선은

나를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득도, 점유도 아니었다.


감당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방식이었다.


말을 붙이지 않아도

곁에 있음을 알리는 태도.

상실을 과장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선택.


나는 그렇게 애도했고,

그 방식으로

지금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뻬뽀네는

아버지가 내게 붙여준 이름이다.


이탈리아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에 나오는

그 Peppone.


투박하지만

끝까지 감당하는 사람.


다 알 것처럼 굴지 말고,

모르면서도 함부로 쓰지 말라는 뜻으로

아버지는 그 이름을 남겼다.


그래서 나는 이 브런치에서

그 이름으로 글을 쓴다.

그 이름은 지금도

나를 그 자리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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