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 불가능한 주관성

by Peppone

입증 불가능한 주관성


앤서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 〈더 파더〉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영화가 치매를 다루는 영화라기보다 증언할 수 없는 상태를 다루는 영화라는 점이었다. 치매는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병이지만, 그 내부 감각은 쉽게 언어로 옮겨지지 않는다. 바깥에서 관찰은 가능하다. 반복되는 질문, 망각, 분노, 의심, 시간 감각의 붕괴, 관계의 혼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확인 가능한 징후일 뿐이다. 정작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입증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불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치매를 앓는 사람의 상태를 설명하거나 계몽하려 들지 않는다. 의료 정보처럼 정리하지도 않고, 가족 드라마의 눈물로 흘려보내지도 않는다. 대신 영화는 관객을 그 사람의 감각 안으로 밀어 넣는다. 방의 구조는 미세하게 바뀌고, 인물의 얼굴은 어느 순간 다른 얼굴이 되며,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조금 전의 말이 지금의 진실이 아니게 되고, 지금의 관계가 다음 장면에서 뒤집힌다. 관객은 보고 있으면서도 확신할 수 없고, 듣고 있으면서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불안은 공포영화의 문법과 닮아 있다.

그러나 귀신도 없고 살인자도 없으며, 특별한 사건도 없다. 그런데도 무섭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건드리는 공포는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지각 자체의 불안정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이 맞는지, 방금 들은 말이 진짜인지, 저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세계가 낯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붙들고 있던 감각의 바닥이 빠져나가는 순간. 〈더 파더〉는 그 무너짐을 아주 집요하게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치매를 재현한다고 말하기보다, 치매의 내부를 형식으로 추정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그 추정은 윤리적으로도 위험한 일이다. 정말 저런 감각일까? 정말 저런 식으로 시간이 흐를까? 치매를 겪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 연출된 공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병은 애초에 정확히 검증될 수 없는 영역을 품고 있다. 바깥 사람은 안을 모르고,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안정적으로 증언하기 어렵다. 결국 남는 것은 파편뿐이다. 표정, 실수, 반복, 분노, 울음, 모멸감, 순간적인 맑음. 영화는 그 파편들을 모아 중심부를 더듬는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치매를 다룬다는 사실보다, 주관성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입증 가능한가를 묻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늘 이해했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고통은 완전히 입증되지 않는다. 통증도 그렇고, 공황도 그렇고, 우울도 그렇고, 노쇠도 그렇다. 당사자가 말해도 타인은 다 알 수 없고, 당사자조차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인간의 내면에는 늘 법정에 제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증거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 진술로 정리되지 않는 혼란, 객관화되는 순간 이미 놓쳐버리는 경험. 〈더 파더〉는 그 비가시적 영역을 영화라는 형식으로 잠시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가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는 단지 노쇠하거나 병든 사람을 연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자존심이 있고, 매력이 있고, 고집이 있고, 판단하고 싶어 하며, 모욕당했다고 느끼고, 농담을 던지고, 타인을 밀어내고, 동시에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그는 병명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치매 환자가 아니라, 끝까지 한 인간이다. 그 인간성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의 붕괴는 더 잔인하다. 무너지는 것은 기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노년의 감각을 이토록 정면에서 다루는 영화는 드물다.

대개 노년은 관찰의 대상이 되거나, 회상의 장치가 되거나, 가족의 서사 속 기능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더 파더〉는 노년의 혼란을 외부에서 보지 않는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누구도 타인의 붕괴를 완전히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그 불가능성을 피하지 않는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한 채, 그 알 수 없음에 가장 가까운 형식을 찾아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어쩌면 치매는 바깥에서 가장 많이 말해지지만, 안에서는 가장 말해지기 어려운 상태일 것이다. 가족은 돌봄의 언어로 말하고, 병원은 진단의 언어로 말하고, 사회는 비용과 부담의 언어로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는 거의 말해지지 않는다.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파더〉는 그 침묵을 대신 말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그 침묵의 구조 자체를 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그래서 보고 나면 슬프다기보다 먼저 불안하고, 불안하다기보다 먼저 무력해진다. 인간은 자기 감각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얼마나 빠르게 세계로부터 밀려나는가. 그리고 그 붕괴는 얼마나 철저히 개인적이어서, 결국 누구에게도 완전히 입증되지 못하는가.


입증 불가능한 주관성.

이 말은 치매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치매는 그 사실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결국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가를 다시 생각했다. 기억, 관계, 공간, 시간, 언어. 그것들이 조금씩 어긋나는 순간, 사람은 단순히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던 현실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그 밀려남은 너무 사적이어서, 누구도 완전한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더 파더〉는 치매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는, 증인이 있을 수 없는 세계를 영화만의 방식으로 잠정적으로 가시화한 작품이다. 그 세계는 완전히 입증될 수 없고, 완전히 재현될 수도 없으며, 어쩌면 끝내 오해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떤 예술은 바로 그 입증 불가능성 앞에서 시작된다. 〈더 파더〉는 그 드문 경우에 속한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대신 흔들리는 감각 자체를 관객에게 건네는 영화. 그래서 이 영화는 훌륭한 치매 영화라기보다, 인간의 주관성이 어디까지 고립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차가운 기록처럼 남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욕망이 욕망을 욕망하는 구조